◎아태 최대행사지만 실행계획 선언 불과/제도·구속력 갖춘 실효기구 거듭나야또다시 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계절을 맞고 있다. 22일부터 25일까지 마닐라에서는 18개국 관련 장관과 지도자가 참석하는 아태지역내 최대의 연례행사가 치러졌다.
이번 APEC회의의 성과는 한마디로 MAPA(APEC을 위한 마닐라 실행계획)의 채택으로 종합된다. 4개 부문으로 구성된 이 계획은 역내 무역 투자자유화(선진제국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를 위한 개별회원국 및 공동 실행계획과 경제·기술협력, 개발강화선언 등으로 구성됐다. 다른 부문들이 통상적인 협력을 위주로 하는 반면, 무역 투자자유화 계획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어찌 보면 모양새에 있어서는 우루과이 라운드(UR)의 경우보다도 더 앞서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관심은 여기에 그다지 집중되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 계획의 성격 때문이다. UR가 무역관세일반협정(GATT)이라는 협상기구 내에서 진행됐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APEC에 의한 자유화 추진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자발적인 「선언」에 불과하다. 따라서 각국이 제출한 계획은 하등의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지 않을 뿐더러 회원국간 협상의 결과도 아니다. 또 이 계획의 실현단계에서 최혜국 대우의 처리를 비롯하여 현실적인 난관이 허다히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8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APEC의 활동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93년 시애틀회의 때부터이다. 미국의 제안으로 최초의 지도자회의가 개최되었고 APEC은 현재의 골격을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또 이 회의의 활성화를 배경으로 미국은 유럽연합(EU)에 대한 협상권을 강화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당시 진행중이었던 UR타결에 박차가 가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이 북미자유무역지역(NAFTA)을 결성하고 2000년대초 전미주자유무역지역(FTAA)의 형성을 주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APEC의 「기구화」에는 극히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시각에서는 APEC이야말로 아태지역을 잇는 유일한 다변적 교량이며 또 아시아지역의 독자적인 경제지역주의 추구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APEC을 어떤 지역기구로 발전시키는 것은 EU와 대립되는 또다른 지역블록을 시도한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현재의 상황에 안주할 수 있으며 APEC의 기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APEC은 구속력이 없이 단지 상호이익의 테두리내에서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APEC내에서 회원국들 간 개별 첩촉과 대화는 현안에 대한 협력이나 공동보조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APEC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발전방향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시장의 확대 및 실질적인 협력의 강화, 그리고 대외협상권의 제고를 비롯하여 APEC이 가져올 수 있는 준지역주의적 이익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89년 APEC의 설립 때부터 한국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실제로 아태지역은 우리의 대외거래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EC이 단순한 정기행사를 거듭하고 있다는 현실은 그만큼 이 회의의 실효성에 불안한 전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나마 일부 주도국이 일시적으로 불참을 결정할 경우 이제껏 업적이 와해될 가능성마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APEC이 기구로서의 기반을 갖추어 나가는 한편 안건에 있어서도 특정지역의 이해에 기울어지기 보다는 공동번영을 논하고, 회원국의 입장정리보다는 실효성 있는 결정을 취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를 바라고 싶다.
끝으로 제도의 설정이 없이는 아무 것도 지속될 수 없다는 J.모네의 명언이 생각난다. APEC이 언론매체나 화려하게 장식하고 큰 실익이 없는 대규모 연례행사로만 끝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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