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읽는 ‘고통과 재미’/17세기 조난당한 청년 통해 중세적 자기인식 시작 그려/난해한 기호학 의미 벗어나 파편적 재미만 느껴도 다행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단숨에 흥미롭게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기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대가이거나 지적 허위의식이 강한 거짓말장이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 중세와는 시간 이상의 깊은 간극을 느끼는 한국 독자들에게 에코의 작품을 속내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더욱이 소설 안에 녹아있는 기호학자로서의 에코의 의도까지 알아차리기란 더 어렵다.
그런데도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 독서계에서도 에코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 자신도 자신의 책이 대중적 인기를 느끼는데는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일부 독자들에게 내책이 커피 테이블의 장식품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이걸 바보에게 매기는 세금 정도로 생각한다』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독자관은 오만하다.
그렇다면 정말 독자 대부분은 바보 세금을 내고 있는 것일까. 물음의 답은 에코의 신작 「전날의 섬」(열린책들간 전 2권)에서 찾을 수 있다.
14세기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종교학과 범죄소설의 이종교배서격인 「장미의 이름」, 스릴러적 기법을 차용한 「푸코의 진자」. 이들에 이어 94년에 발표한 세번째 소설 「전날의 섬」은 수많은 발명과 발견으로 오히려 지적 혼란이 가중됐던 17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1643년 조난당한 젊은 첩보 장교 로베르토는 날짜 변경선인 경도 180도의 바다 가운데 버려진 큰 배 「다프네」호에 홀로 살아 남는다.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로베르토는 아버지와 참전했던 30년전쟁, 존재를 확신하는 환상속의 동생 페란테, 어느 살롱에서 만난 여인 릴리아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배에서 만난 또다른 조난자 카스파르 신부는 백과사전과 같은 인물로 두 사람은 종교적 철학적 논쟁을 거듭하게 되고, 거리상으로는 지척이지만 시간상으로는 24시간이 차이나는 「전날의 섬」에 이를 방법을 강구한다. 이시대에는 수영을 익힌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신부는 결국 자신이 만든 잠수종으로 전날의 섬을 향해 떠나고 홀로 남은 로베르토는 자기 삶을 마무리 짓기 위해 소설을 써나간다. 자신의 난파가 동생 페란테의 음모였다는 소설 줄거리는 점차 그의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섬 반대편에 릴리아가 떠내려와 있다고 생각한 로베르토는 날짜 변경선을 따라 표류를 시작한다.
물론 이 소설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면 타자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세적 자기인식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며, 항해술, 병법, 그리스 로마신화의 허구성 등을 백과사전적으로 제시한 고급 저작물이다.
하지만 이런 심오한 부분을 들어낸다해도 그의 소설 「전날의 섬」이 주는 파편적 재미는 보통 이상이다. 소설을 통째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독자의 권리라면 에코의 독자들은 대부분 그 권리를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연보
32년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출생
54년 토리노 대학 철학과 졸업, 졸업 논문 「성 토마스의 미학적 문제」
55년 이탈리아 방송협회(RAI) 텔레비전부 근무
62년 토리노 대학, 밀라노 대학서 미학강사, 첫 저서 「열린 작품」 출간
65년 주간지 「레스프레소」에 기고 시작, 남·북미 여행
69년 뉴욕대학서 강의, 국제기호학연구협회 사무총장
70년 아르헨티나 여러 대학서 강의
71년 데달루스라는 필명으로 좌파 기관지 「일 마니페스토」에 기고. 볼로냐대학 기호학 조교수
73년 밀라노에서 제1회 국제기호학 회의 조직
75년 볼로냐대학 기호학 정교수, 동대학 커뮤니케이션·연극학 연구소 소장
79년 문학월간지 「알파메타」 공동창간
□저서
「조이스의 시학」(65년) 「시각 커뮤니케이션, 기호학을 위한 노트」(67년) 「기호」 「집의 풍습」(73년) 「일반 기호학 논구」(75년) 「기호학 이론」 「대중의 슈퍼맨」(76년) 「논문작성법 강의」(77년) 「소설속의 독자」(79년) 「장미의 이름」(80년) 「푸코의 진자」(88년) 「폭탄과 장군」 「세 우주 비행사」(88년) 「해석과 초해석」(92년)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전날의 섬」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94년)
◎고려대 김성도 교수와 인터뷰/“소설가보단 철학자가 좋다”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 동시에 문학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에코. 자신을 『인생의 한때, 기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철학자』라고 규정한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실린 김성도 교수(고려대 언어학과)와 에코와의 대담 「인류는 영원히 책을 필요로 할 것이다」에서 에코는 자신을 소설가보다는 철학자로 규정하고 싶어했다.
철학자 에코의 의미는 특히 대중문화에 관한 기호학적 접근에서 그 무게가 느껴지는데, 『현대문화를 이루는 두가지의 틀,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는 동일한 문화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특히 「만개한 기호학」과 관련, 지나치게 단절적이며 동시에 세계에 대한 지나친 이분법적 사고라는 「반기호학자」들의 비난을 의식한 듯 에코는 『우리시대가 세계를 커뮤니케이션과 의미작용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기호학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기호학의 죽음이며, 이것은 곧 기호학이 자신도 모르게 도처에서 실현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호학의 담론이 동양을 배제하고 있다는 김교수의 지적과 관련, 그는 『첨단 커뮤니케이션의 도래로 20년 안에 상호문화 연구를 본격화할 수 있다』는 「비본질적」 답변을 제시했는데, 백인중심적 사고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멀티미디어 시대의 책의 운명에 관한 그의 해석. 책은 『배, 사막, 화장실에서 심지어 성행위를 하면서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매체』라는게 「책은 영원하다」는 주장의 근거다.
두 사람은 6월29일부터 7월9일까지 프랑스의 「세리지 라 살 국제문화센터」의 세미나에서 만났다. 에코는 올해의 주제 인물이었는데 프랑스 언론의 인터뷰를 사양한 그가 한국 교수와 단독 면담을 가진 것은 별스런 일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에코 전문 번역가 이윤기씨/“번역이 아니라 혈투였습니다”
『번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한바탕 혈투였다』
움베르토 에코 소설의 전문 번역가가 되다시피 한 소설가 이윤기씨(49). 그는 에코의 책을 붙잡을 때마다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는 느낌이다.
국내에 번역돼 나온 에코의 장편소설 세 가지,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에 이어 「전날의 섬」까지 모두 그가 번역했다. 이씨는 사실상 에코와 국내에 수십만이 된다는 그의 독자들을 이어주는 「문」인 셈이다.
그는 「전날의 섬」을 옮기면서도 『수시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느낌에 시달리곤 했다』고 한다. 날짜변경선 하나를 두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제를 논하면서, 특유의 상상력에 상상력을 점화시켜 나가는 에코에게 질려버렸다는 것.
『에코의 현란한 말장난, 정교한 수사학, 현미경 수술을 방불케 하는 심리·상황·정경 묘사는 한마디로 장관이지만 독자에게는 그것이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게 번역자의 임무』라고 그는 말한다. 흔히들 『에코와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는 운이 좋다』고들 하지만 이씨는 『맞는 말이다, 번역자만 빼고』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그러면서도 에코 번역의 어려움이 자칫 있을지도 모를 잘못된 혹은 엉뚱한 번역(그는 이를 「부실공사」라 말한다)의 면죄부는 될 수 없다며 계속적인 「바로잡음」의 의지를 밝혔다.
이처럼 전문번역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본업은 소설가다. 77년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 후 장편소설 「하늘의 문」 등 문제작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 중견작가.<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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