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나 오페라의 등장인물 나열 순서는 별 것 아닌 것같지만 과거와 현재의 관행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오늘날 고전희곡이 됐지만 당시에는 바로 연극에 사용되던 대본이어서 등장인물의 나열이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을 안보고 등장인물이 나열된 것만 보아서는 도무지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등장인물은 당연히 로미오, 줄리엣…순일 것 같지만 신분이 제일 높은 영주가 맨 먼저이고 나이어린 로미오는 어른들 후에 나온다. 신분보다 더 큰 작용을 한 것이 남녀 구별이다. 하인계급까지 남자들이 모두 열거된 후에야 레이디 몬태규와 레이디 캐퓰렛이 나오고 정작 줄리엣의 이름은 거의 끝에 가서야 찾아볼 수 있다.초창기부터 여성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오페라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신분문제는 역시 오래동안 반영되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대본에는 백작부부에 이어 세번째로 시동인 케루비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귀족사회의 시동은 귀한 집의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는 타이틀 롤(제목에 이름이 나오는 등장인물)이 누구이든 일단 영주가 맨 위를 차지한다.
그리하여 만토바 공의 이름이 리골레토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이런 관행은 서서히 바뀌어 푸치니의 오페라에 이르면 내용상 신분의 구별이 있든 없든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맨 위를 차지한다. 미국에서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들에서 보는 것처럼 등장 순서대로 열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오리지널 희곡 뿐 아니라 오페라까지도 프로그램에서는 그렇게 하고있다. 이것은 철저한 민주주의때문이라기 보다 등장인물의 역을 빨리 알고자 하는 실용적인 방책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프로그램의 등장인물 순서는 절충하면 어려움없이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프로그램을 거창하게 만들고 너도나도 주역만 하겠다고 나서는 곳에서는 등장인물 열거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이름이 위에 올라가면 신분(?)이 올라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풍토도 우리나라 특유의 현상이다.<조성진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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