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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의 오만/진회숙 음악평론가(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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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의 오만/진회숙 음악평론가(1000자 춘추)

입력
1996.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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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클래식을 좋아하는 한 친구에게 현대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현대인이 듣는 음악이 곧 현대음악』이라는 명쾌한 답변을 해왔다. 고대인이 듣는 음악이 고대음악이고 중세인이 듣는 음악이 중세음악인 것처럼 현대인이 듣는 음악이 현대음악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는 것이다.물론 그 친구가 오늘날 현대음악이 처해 있는 현실을 모르고 이런 이상적인 정의를 내린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런 단순한 정의 뒤에는 실제로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유머러스한 비판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현대음악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대부분의 현대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유사 이래로 음악이 이처럼 대중을 소외시켰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예술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변증법은 점점 형식에 유리한 쪽으로 진행되어 갔는데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형식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음악 역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갖게 되었고 이렇게 되면서 현대음악은 그 자신의 형식 논리를 과도하게 발전시켰다. 이렇게 지적인 에너지를 과다하게 낭비하면서 만들어지고 있는 복잡한 구조와 형식의 현대음악은 이제 「들을 귀」를 가진 몇몇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물론 어떤 음악이나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듣고 즐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음악을 만들어 놓고 단지 「들을 귀」를 가진 사람만 들어라 하는 식의 태도 역시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작품이 진정한 예술작품이라는 고전적인 예술관에 동의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작곡가의 자기고백에 충실한 나머지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무시한 음악, 그래서 대중에게는 마치 풀 수 없는 암호처럼 느껴지는 음악, 이런 음악이 있는 한 음악에 있어서의 소외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현대음악의 우월적인 태도, 청중의 감성을 무시하는 그 오만한 자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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