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정책·쟁점없이 권력정치만 난무/한국식 대권경쟁에 국민들마저 중독「누구냐」가 공통의 화두로 등장할 때이다. 새로운 세기를 열 대통령을 선출할 선거가 일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화두는 「긴 대화」를 낳지 못하고 있다. 철학과 정책을 가슴 속에 품고 구체적인 각론을 논하기 보다 공허한 원론과 쉬운 총론만을 펼치면서 쟁점을 피해가는 것이 한국의 대권주자군이다 보니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논할 상황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대화는 언제나 「허허」라는 탄식의 소리를 낳고 절레절레 고개 젓는 제스처로 종결되고 만다. 국민은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이 지지할 주자를 결정하라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그러한 알맹이 없는 한국식 대권경쟁에 중독되어 있다시피하다. 「허허」라는 탄식과 고개 젓는 제스처로 매번 종결되지만 기회가 생기면 다시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대권주자의 동정을 살핀다.
무엇 때문일까. 역설적이지만 한국식 대권경쟁은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모든 이가 화두로 삼고 있다. 철학과 정책을 매개로 하는 알맹이 있는 대권경쟁은 난해하고 건조하다. 아울러 치러야 할 희생이 무엇이고 지불하여야 할 대가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를 정치의 정면에 부각시키기 때문에 편안함을 조성하기보다 국민의 고민을 가중시킨다. 그러한 건전한 대권경쟁이 많은 청중을 끌어 모을리 만무하다.
한국식 대권경쟁은 다르다. 주자마다 정책에 대한 논의를 포기하고 쟁점을 피해가기 때문에 관중인 국민의 눈에 비치는 것은 마키아벨리식의 권력정치 밖에 없다. 어느 주자가 대통령의 눈밖에 나고 누가 어느 정당을 어떻게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려 하는가가 한국식 대권경쟁의 핵심 줄거리이다. 대중은 이를 읽어 내려가면서 스릴을 느끼고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게다가 마키아벨리식 권력정치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주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판세를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인이 동일한 대권논의를 계속 반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국인은 실망과 반발감을 촉발시킨 바로 그 평범한 한국식 대권경쟁에서 독특한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관중석에 앉아 한국식 대권경쟁을 즐길 때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배우의 마키아벨리식 손익계산과 전략을 점치다 보면 어느새 관중의 마음에까지 그늘이 지고 만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냉소주의에 관중이 젖고 내가 이기려면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무서운 승자독식의 정신을 부지불식 간에 배우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적 대권경쟁을 즐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권신화의 함정에 내던지고 만다.
대권은 대통령이라는 「남」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실제 생산현장에서 가족적 평화를 일구어내고 생산성 향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노와 사 당사자인 것처럼 말이다.
안보라고 다를 리 없다. 전쟁은 대통령의 강경한 대북 경고가 아니라 철책선의 국군이 억지하는 것이다. 한편 복지부동과 부정비리의 척결이나 「작지만 강한 정부」의 구축은 공무원 사회가 스스로 자기 정화에 나설 때 가능해지는 공무원 사회 자신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한국식 대권경쟁의 확산 속에서 진정한 대권이 어디에 있는가를 잊고 있다. 공무원 사회는 복지부동이고 재벌은 해외로 생산지를 옮긴다. 반면에 노와 사는 목전의 작은 이익을 추구하다 노사개혁이라는 보다 큰 이익을 놓치고 만 상황이다.
한국식 대권경쟁의 중독성을 경계하고 「누구냐」는 질문 대신 케네디의 말 속에 담긴 진리를 되새겨 볼 때이다. 『조국이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기 보다 당신이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보라』는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정치권이 달라질 날을 기다리기에는 우리의 사정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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