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켓 주인의 꿈을 안고 땅팔고 빚얻어 온 한국/순식간에 잘려나간 손가락/그 아픔보다 더한 절망감…「내 손가락과 내 꿈은 어디에…」
『한국에서 돈 많이 벌어 돌아가 예쁜 애인과 결혼한 뒤 작은 슈퍼마켓을 차려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5월25일 한국땅에 첫발을 디딘 방글라데시인 한난 말라(27). 김포공항에 내려선 순간 머리속은 온통 4∼5년후 주인이 돼 있을 슈퍼마켓에 대한 장미빛 상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꿈을 위해서는 어떤 고통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고향 친구 3명과 함께 15일짜리 관광비자를 얻어 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비용은 톡톡했다. 640만원 가량을 현지 브로커에게 건네고서야 비자와 항공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들이 얻은 것은 관광비자였지만 애초부터 한국관광을 꿈꿀 처지는 아니었다. 현지 브로커와 한국브로커의 알선으로 이미 근무할 공장까지 정해져 있었다.
김포공항을 나선 한난 일행은 마중나온 한국 브로커의 안내로 곧장 인천으로 향했다. 일행은 여인숙에서 지내며 대기하다 입국 4일만인 5월29일 사전계약대로 인천의 공장으로 각각 흩어졌다.
한난에게 「슈퍼마켓을 안겨 줄」 공장은 자동차부품 제조회사인 D사였다. 그는 열심히 일해 하루 빨리 목돈을 만져보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다행히 조건은 좋았다. 하루 8시간씩 일하고 한달에 65만원을 받기로 했다. 4년 먼저 들어와 반월공단에서 일하고 있던 형 조니(30)에 비해 월 5만원 정도 적을 뿐이었다.
한난은 계약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작업장에 배치됐다. 주어진 일은 프레스작업이었다. 방글라데시에서 22살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줄곧 점원으로 일해 온 그는 기계를 만져 본 경험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마다할 입장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기계조작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껏 옆을 지나던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프레스를 조작하는 방법을 손짓 발짓으로 일러 주었다.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대강 알 것 같기도 했다. 10분쯤 지나자 그 아주머니는 설명이 끝났다는 듯 자리를 떴다.
한난은 배운대로 기계를 조작해 보았다. 일은 잘 풀려 가고 있었다. 통장에 목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나 꿈은 너무도 쉽게 깨져 버렸다. 작업을 시작한지 3시간쯤 지났을까, 쇠뭉치가 오른쪽 손등에 떨어졌다. 엄지 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 4개가 떨어져 나가면서 오른손은 온통 피범벅이 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난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잘린 손이 쇠뭉치에 짓이겨져 봉합수술마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잘려 나간 오른손이 지독히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 슈퍼마켓의 꿈이 산산조각나 아득하게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도 야속했다.
안산 반월공단에서 일하던 형 조니가 병간호에 나섰으나 인천까지 오가기가 너무 힘들어 한난이 병원을 안산으로 옮겨야 했다. 조니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잔업을 도맡다시피 하면서도 매일 동생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병원에 입원한지 4∼5일쯤 됐을까. 형 조니가 강제출국을 당하게 됐다. 동생의 병간호를 마치고 안산역에서 반월공단으로 돌아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조니에게 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이 다가와 여권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4년여동안 불법체류자로 지내왔던 조니는 꼼짝없이 강제출국 「그물」에 걸렸다. 조니는 병상에 누워있는 동생을 남겨둔 채 방글라데시로 떠나갈 수 밖에 없었다. 조니가 귀국하기 전날 형제는 부둥켜 안고 긴 울음을 울었다.
한난은 5개월 가까이를 병원에서 보내고 10월말 퇴원했다. 오른손에는 엄지 손가락만 뎅그라니 남아 있었다. 손수건으로 오른손을 감고 나와 취재팀을 만난 그는 『병원에서 붕대에 감긴 오른손을 보면서 앞으로 살길이 막막해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또 울먹였다.
그는 요즘 왼손으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등 왼손을 요리조리 사용해 본다. 왼손이나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혹시 일자리가 생길지도 모를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허망한 것임은 누구보다도 그자신이 잘알고 있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산재보상금과 휴업급여 장애보상금 등은 불법체류 벌금과 본국에서 진 빚을 갚고 나면 얼마나 남을 지 모르겠어요』
한난의 가족은 할머니와 부모, 6명의 형과 여동생 하나 등 모두 11명. 방글라데시 빅럼푸르지역에서 소작농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 왔다. 조금 있던 땅은 한난의 한국행 비용을 마련하느라 팔아야 했다. 아버지를 졸라 땅을 팔고도 400만원 가량 빚을 졌다.
『먼저 귀국한 형 조니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가족들이 눈물로 지내고 있다』는 한난은 『고향에 20살된 예쁜 애인이 기다리고 있지만 집을 마련하고 결혼하려면 1,000만원가량이나 필요한데 이 꼴이 됐으니 결혼은 이제 영영 못할 것 같다』고 쓴웃음을 지었다.<이진동·이상연 기자>이진동·이상연>
◎외국인 노동자 현황/불법취업 포함 20만명 추정/관광비자 입국후 잠적·산업연수생 이탈 빈발
국내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은 정부발표로도 이미 18만명을 넘어 섰다. 그러나 한국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등 시민단체는 20만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동부가 발표한 국내 외국인 노동인구는 18만3,000명. 합법취업자 및 산업연수생 7만2,000여명에 불법취업자 11만700여명(추정)을 더한 수치다.
「합법취업자」는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학원 영어강사, 교수 등 내국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전문·기술직종에 국한된다. 이들은 1만1,600여명으로 전체의 6.3%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을 제외한 단순기능인력은 원래는 모두 불법취업자였다. 그러다 정부는 94년 인력난 해소를 위해 단순기능인력이 국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했다. 현재 국내에는 해외현지법인 추천자 1만9,700여명을 포함, 6만800명의 산업연수생이 들어와 있다.
불법 취업인력의 대부분은 관광비자 등으로 입국한 뒤 잠적한 중국 조선족동포와 지정업체에서 이탈한 산업연수생이다. 산업연수생의 직장이탈률은 연평균 3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시민단체들은 이밖에도 미확인 불법체류자와 강제출국조치를 당한 후 재입국한 사람, 밀입국 조선족 동포 등이 많이 있어 전체 불법체류자는 정부가 파악한 것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취재후기/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
한난과의 만남은 안산외국인상담소의 주선으로 이뤄졌으며 92년부터 불법체류중인 이라나(30)가 통역을 해 주었다. 이라나도 한국인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4월께 반월공단에서 같이 일하던 한국사람이 『xx놈아』라고 욕을 퍼붓자 작업반장에게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과는 더이상 일을 못하겠다』고 따지다 폭행을 당해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아직 완치되지 않아 지금까지 6개월째 일을 못하고 상담소를 찾아오는 방글라데시인의 통역일을 거들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1,000만원가량을 본국에 송금했다』며 『팔이 완치된 뒤 1∼2년가량 더 지내다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난에게는 병원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 아니스(28)가 있는데 그역시 코리안드림에서 멀어져 있는 처지다. 올해 1월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을 피해 기숙사 2층에서 뛰어내리다 양다리가 부러졌다. 1년 가까이 병원에서 지냈으나 여전히 목발이 없으면 걷기 힘든 상태여서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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