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잔치는 끝났다’ 이후 겪은 비판과 오독/힘들었던 세월 창작의 에너지 삼아 다시 사랑과 혁명을 노래한다/그리고 다짐한다 “이제 글로만 말하련다”「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가 돌아왔다.
「서른,…」의 시들을 세상에 내보낸 지 정확히 3년 만에, 그가 등단했던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5편의 신작 시들을 발표했다. 잔치가 끝나 버린 나이, 서른을 훌쩍 뛰어 넘어 이제 그는 서른다섯이다.
여전히 그는 거침 없는 말투로 사랑과 「혁명」을 노래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들에는 첫 시집 「서른,…」 이후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 극복의 과정이 있다. 무엇보다 겪을 걸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숙함이 엿보인다(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어떤 별도 쏟아지지 않았다/ 어떤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고통은 이 시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는다」(「불면의 일기」 부분)
90년대 상반기 최대의 문화상품, 50만권 가까이 팔려나간 「서른,…」이후 최영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지내려 애썼다. 그를 가만 두지 않을 세상이었다.
지난해 8월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학위논문은 「에드워드 호퍼의 ‘실내의 인물’ 모티브 연구」. 공부의 연장으로 올 봄에서 여름까지 석달여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내년 봄께 거기서 본 것들을 책으로 묶어볼 생각이다. 여행중 발견한 영국화가 「프란시스 베이컨과의 대화」도 번역중이다. 최영미는 아직 운전면허도 없고 차도 없다. 요즘은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그간 그의 내면 풍경은 많이 달라진 듯하다. 그는 『시가 원한다고 나오겠느냐』며 『이제 진정 글로써만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서른,…」에서 과감하고도 도발적인, 솔직한 시어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최영미. 응큼떨지 않고 난 척하지 않는 그의 시는 흔히 여성다움이라고 일컬어지던 것들을 거부했다. 그것이 청춘이든 운동이든, 사랑이든 혁명이든, 혹은 사회이든 간에, 체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시들은 피와 땀과 정액 냄새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 그에게 그러나 지난 3년은 80년대의 경험보다 더 혹독한 것이었을 지 모른다. 언젠가 『시집이 팔린 만큼 돈도 좀 벌고 이름도 얻었지만 그만큼 나를 이해받은게 아니라 마치 매혈을 한 것처럼 삶이 더 황폐해진 느낌』이라고 고백한 적도 있듯.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혁명이 진부해졌다/ 사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랑이 진부해졌다」(「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부분)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걸」(「서른, 잔치는 끝났다」 부분). 이런 그를 일부는 운동권 경험을 팔아먹는 변절자라고 비판했다. 불순한 시선들도 그를 흔들었다. 「어느 놈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슬픈 까페의 노래」부분) 이라고 노래한 그를 세상은 오독했다.
신작 시편에서 그는 불면의 날들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얼마나 더 흔들려야 무너질 수 있나/ 우리가 변화시킨 세상이, 세상이 변화시킨 우리를 비웃고 (중략)/ 아,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이해받지 못한 가을이 저 혼자 깊어가고/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는 시가 완성되었다」(「불면의 일기」부분)
그러나 시인은 힘겹게나마 그 것들을 방생했다.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그는 「이 생에 내가 짓고 허문 마음의 감옥들과 자투리로 남은 청춘을 강둑에 앉아 방생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더 날을 세운다.
「혁명은 이제 광고 속에만 있다 (중략)/ 붉은 시월이 노란 시월로 둔갑할 때까지/ 현대자동차에 레닌의 얼굴이 겹칠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나/ 노란 시월이, 놀라운 시월이 밀려온다/ 나를 사다오, 세기말의 자본주의여―」(「지하철에서: 노란 10월」부분)
최원식 교수는 『「지하철에서…」는 80년대 혁명적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한 낭만적 부정에 그친 안이한 것이었다는 뼈저리고도 치열한 시인의 인식이 한층 심화한 시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시인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진통의 밤이었다 (중략)/ 몰래 앓던 여름이 피 흘린 들녘, 그 자리/ 아침 서리 내려 굳으면/ 기다리던 가을이 한꺼번에 몰려오리라」(「시와 똥」부분)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정결한 언어로 노래한다.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중략)/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꿈의 페달을 밟고」 부분)
평자들은 『시 자체가 아니라 시 외적 요소로 그를 읽은 이들이 끼친 악영향과 문단 내부에서조차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최영미가 3년의 침묵을 생산적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 섹스의 추억」에서 노래했듯,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인가. 그가 다시 시를 쓰는 것은 「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보인다. 「서른 잔치」는 이제야 시작될 지도 모른다.<하종오 기자>하종오>
□약력
61년 서울 출생·35세
80년 서울대 서양사학과 입학
85년 졸업후 재야단체 활동
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등 발표 등단
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출간
95년 홍익대 미술사학과 석사과정 수료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너 없이는 어떤 풍경에도 잠길 수 없어
하늘 향해 팔 벌리고 생매장된 나무들
죽어가는 가지 끝에, 네 얼굴을 건다
무모했던 여름의 기억들도
개울져 흐르는 저마다의 진실도
이 생에 내가 피운 모든 먼지들도
저무는 햇살에 부서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버릴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데
설익은 낙엽 한 떼 우수수 난파한 배처럼 떠다니는
그해 시월 강둑에 앉아
이 생에 내가 짓고 허문 마음의 감옥들이여
대답없이 오래 썩은 한숨이여
차라리 새 무게로 가라앉기라도 했으면…
그해 시월 나는 강둑에 앉아 자투리로 남은 청춘을 방생했다. 쥐었다 풀었다 두 주먹만 허허롭게 살아 놓아준 삼십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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