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때의 유명한 문장가 강수의 청렴한 일생과 아름다운 사랑얘기가 삼국사기 열전 제6권에 수록돼 있다. 임나가량(임나가라·경북 고령군) 출신인 그는 머리가 커서 두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무열왕 즉위(654년)때 당나라에서 온 서신에 어려운 문장이 있어 왕이 그를 불러 해석케 했다. 왕은 막힘없는 해석에 감탄하여 『경의 머리를 보니 강수선생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소』해서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다. 문무왕이 『우리 선왕께서 당나라에 군사를 청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데는 무공도 컸으나 강수의 문장의 도움도 있었다』고 평했을 정도로 그의 문명은 대단했다.그는 1년에 조 200석 녹봉의 「사찬」이란 벼슬까지 지냈지만 재물에는 관심이 없어 생활은 궁핍했다. 신문왕(692년)때 그가 타계하자 미망인은 망자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 얼마 안되는 재산을 모두 써버려 호구지책이 막연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이 후사를 내리려 하자 그녀는 『천한 몸으로 오래도록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어찌 감히 또 은혜를 바라겠습니까』하며 향리로 돌아가 청빈한 여생을 보냈다.
강수가 20세때 그의 부모는 읍내 권세가의 딸을 며느리로 맞으려 했으나 그는 이미 사랑하는 처녀가 있음을 고백하고, 그녀가 대장간집 딸이지만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면서 자기뜻을 관철했다. 재물과 권세와 허명을 초개처럼 여기고 인연과 애정과 도리를 소중히 한 강수의 러브스토리는 아직도 역사책 속에 그 향기를 간직한 채 살아 숨쉬고 있다.
안경테 판매를 안경사가 독점하게 해달라는 조건의 뇌물을 받은 장관부인이 구속돼 사람 모이는 곳마다 화제다. 그 부인의 이름도 부끄러운 남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기록에 남게 됐다. 미천한 신분이면서도 재물을 멀리한 남편의 뜻을 사후에까지 떠받들어 그 이름을 더욱 고결하게 한 강수의 아내 얘기가 떠오른 것은, 남편의 이름까지 더럽힌 한 「사모님」의 물욕이 어이없어서이다.<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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