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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일 떠날지 모른다’/어느 연구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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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일 떠날지 모른다’/어느 연구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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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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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모른채 눈만뜨면 ‘변화·개혁’/실패가 용납안되는 풍토에 연구마다 ‘거짓 성공’ 판치고…/박봉에도 꾹 참아왔지만나는 S박사로 불린다. 40세. 서울고와 서울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덕연구단지 정부출연 연구소에 들어 왔다. 86년 도미, 꽤 괜찮다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91년 연구소에 되돌아 왔다. 현 직책은 선임연구원. 유학 이전 기간을 포함, 대략 10년째 재직한 셈이다. 급여에 큰 관심은 없지만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연간 3,000만원선이다.

학창시절 공부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현재 연구소 생활에 별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돈은 적더라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정말 더 참고 견디기 어렵다.

두뇌집단을 모아 놓고 PBS를 도입한 것은 정말 불쾌하다. 연구소에 일반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겠다니… 연구소가 무슨 시장판인가. 더이상 연구소에 남아 있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차라리 컨설팅이나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것이 수입면에서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님을 잘 안다. 연구소가 정부 정책에 따라 줏대없이 너무 휘둘린다. 눈만 뜨면 변화와 개혁이다. 연구를 하라고 불러들여 놓고는 시종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언제는 통폐합을 한답시고 이 연구소로 합치라더니 갑자기 다시 분할할테니 저쪽으로 붙으라 한다.

경제발전이 지지부진한 것을 과학기술계의 기술개발 부진 탓으로 돌리려는 것도 못마땅하다. 정부가 효율화를 빌미로 과학기술계를 후려치는 것 같다. 80년대 정부가 연구소를 통폐합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이꼴이 됐다. 지금 정부가 시도하는 것들이 10년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속이 답답하다.

프로젝트 문제에 있어서는 스스로 부끄러움이 들 정도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날 경우 과연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은 용기가 없다. 동료나 선후배들도 마찬가지다. 한때 우리를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진실을 말하면 희생당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가 나와야 이런 풍토가 고쳐질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희생없이 발전한 역사는 없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내가 희생해야 할까. 조용히 있으면 되는데.

연구소에는 독불장군들이 많아야 한다. 권력과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열심히 가는 연구자들이 많아야 과학은 발전한다.

단기적인 성과 요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꿋꿋이 개척해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순응하는 자들을 양산한다. 실패의 경험도 자료로 남겨야 하는데 전혀 그럴 풍토가 아니다. 유학을 했던 미국과는 너무 다르다. 잘못 심어진 나무의 뿌리가 너무 깊이 뻗어 있다.

주위에서는 인사치레로 이제 대학으로 옮길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물어 온다. 연구소를 대학으로 가기 전 잠깐 머무르는 곳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얼마간 연구소에 있다가 대학으로 옮겨 가는 사람을 능력있다고 보는 것도 속이 상한다. 사실 나는 가르치는 것 보다는 연구하는 것이 좋다. 대학이라고 해봤자 기자재도 별로 없고 연구할 분위기도 돼있지 않다. 싫다고 무작정 떠날 수도 없다. 그러나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내일 떠나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신기술개발·우수인력배출 줄이어/그래도 희망의 빛이…/지나친 간섭·통제 관행서 탈피/자율확대로 그들에 용기 주어야

대덕연구단지에 온통 어둠뿐인 것은 아니다. 그래도 희망의 빛은 있다.

생명공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정혁 박사. 88년 세계 최초로 인공 씨감자 대량생산기술에 성공한 뒤 2년여의 연구끝에 재배 실용화에 성공한 「감자 박사」다.씨앗을 뿌리듯 감자를 재배할 수 있는 콩알만한 크기의 인공 씨감자 대량생산기술이 조만간 중국에 판매된다. 중국정부는 최근 30억원짜리 인공 씨감자 생산공장을 50여개 건설키로 하고 계약체결을 앞두고 있다.

정박사만이 아니다. 남들이 어떤 눈으로 보든 실험실을 묵묵히 지키며 연구에 몰두하는 연구원들이 아직도 있다. 동료나 선·후배들이 대학으로 탈출하고 더러는 기업연구소로 발길을 돌려도 『대덕은 나의 고향』이라고 다짐하는 연구원들이 있어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앞날을 지탱하고 있다.

해방후 우리의 과학기술인력은 기껏 대졸수준의 과학기술자 수백명에 불과했다. 반세기동안 연구층은 엄청나게 두터워졌다. 해마다 대학에서 과학기술인력이 수만명씩 쏟아져 나온다. 매년 박사들도 수천명씩 배출된다. 반세기를 거치는 동안 과학기술의 노하우도 많이 쌓았다. 물론 실패도 많았고, 과대포장된 기술개발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도 값진 자산이다.

정부가 82년부터 장기적인 목표로 추진중인 특정연구개발사업. 일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긴 하지만 긍정적인 연구결과들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동안 발표된 논문건수는 9,000여건. 해외에 내다 판 기술도 많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반도체 리드프레임 제조기술」은 20만달러(약 1억6,600만원)에 독일에 팔렸고 한국화학연구소의 「비마약성 진통제 제조기술」은 일본의 한 제약회사에 판매돼 연간 매출액의 4.5%의 로열티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국제적 위상도 많이 높아졌다. 국제협력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학술회의 유치가 이어지고 있고 해외 학술회의에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 수준과 건수도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만드는 것은 이제부터인지도 모른다. 정부는 지나친 간섭과 통제의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연구소는 자율성을, 연구원은 전문성을 확보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연구원들의 사기진작도 시급하다. 현재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들은 『퇴직할 때 그렇게 쓸쓸할 수 없다』고 한다. 많지 않은 퇴직금만 있을 뿐이다. 그 흔한 연금도 없다. 노후가 불안해 한숨짓기 일쑤다. 연구소에서 20년 외길을 걸어봤자 올림픽때 금메달 하나 따는 것보다 못하다는 자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연구원들의 슬픈 자화상은 이제 그만 지워져야 한다. 과학기술자들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것은 사회 전체의 몫이다.<김성호 기자>

◎대덕단지 어은초등학교/전교생 20% 영어 술술 ‘대전의 8학군’/“박사 학부모가 358명,직접 수업도 진행해요”

대덕연구단지 안에 자리잡고 있는 어은초등학교. 전교생 2,178명중 20% 정도가 영어로 편지와 일기를 쓸 줄 알고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희한한 학교다. 학부모중 상당수가 외국유학을 하고 대덕연구단지에 근무하는 석·박사들이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호주 등 영어권 외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학생은 모두 409명.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학부모만도 358명이나 된다. 부모들의 높은 학력 때문인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높다. 「콩 심은데 콩난다」는 옛속담이 새롭다.

이 학교의 가장 큰 자랑은 학부모 자원강사제. 전공분야가 다양한 학부모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 영어회화 특별활동 과학수업 등을 맡는다. 안병곤 교장은 『아이들한테는 다양한 학습기회를, 학부모에는 학교교육 참여 기회를 주는 일석이조의 효과』 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가장 역점을 두는 영어회화 수업은 3∼6학년을 대상으로 매주 수요일 2교시에 상·중·하 능력별로 나눠 실시한다. 외국생활 경험이 있거나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학부모 30명이 직접 수업을 진행한다. 시청각 자료와 어학실습시설도 골고루 갖춰져 있다. 「영어 잘 가르치는 학교」로 소문나 인근 한빛아파트는 1년내내 매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 인기다.

대덕연구단지 연구원으로 근무중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서 3년 거주하다 지난해 11월 귀국한 5학년 양용석군(12)의 영어실력은 고1 수준. 일상회화는 거의 완벽하다. 『외국에서 익힌 영어를 꾸준하게 이어나갈 수 있어서 좋고 친구 엄마가 가르쳐 주니 더 재미있다』고 말하는 얼굴이 해맑다.

중급반 영어회화 지도를 맡은 김영혜씨(36·여)의 표정도 밝다. 『직접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딱딱하게 진행하지 않고 레크리에이션을 가르치는 것처럼 재미있게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필요한 경우 집에서 도표나 그림을 직접 만들어 옵니다』

대학교수와 대덕연구단지 선임연구원이 중심이 된 과학분야 자원강사도 이 학교만의 자랑이다. 과학교사가 선정한 학습주제에 맞춰 해당영역의 특강 및 실험을 매주 한차례씩 맡아 아이들을 기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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