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과 억압의 시기엔 환상을 꿈꾸었지만…/이젠 소시민 모습 담은 ‘진지함’으로 승부한다현실에선 존재할 법하지 않은 영웅. 그래서 억압과 일상에 눌린 소시민을 잠시 동안의 환상 세계로 인도하던 만화주인공 캐릭터들이 달라지고 있다. 환상의 더께를 벗고 진솔한 일상의 세계로 내려앉은 것이다.
정치적 격정도, 사회적 억압도 그 뚜렷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90년대의 끝자락. 오늘의 만화가 「일상의 담론」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시대적 결론일지도 모른다.
「퀴퀴한 골방」의 유일한 오락거리로 치부되던 만화는 이제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지 오래다. 만화가의 캐릭터나 애니메이션 산업으로 부가가치의 새 옷을 입게 된 만화산업은 「만화 평론가」라는 이론적 전사들을 거느릴 정도로 위상이 확연히 달라졌다.
새로운 위상은 새로운 존재 논리를 낳는다. 이제 「저급 문화」의 대명사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된 만화는 어느새 우리 일상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런 일상의 담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만화 작가는 허영만(49)이다. 박봉성 이현세 고행석 등과 함께 80년대 한국 대중만화 시대를 연 허영만의 만화 세계가 달라졌다.
『환상적 영웅이나 섹스 이야기가 성인을 위한 만화의 전부가 아니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저 그런」인생들의 이야기로 성인 만화독자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는 『이제 「만화」같은 만화는 그리기 싫다』고 선언했다. 그가 독자들로부터 진정 얻고 싶은 반응은 『그래, 사는게 이런거지』하는 것이다.
최근 작업인 「오늘은 마요일(마요일)」의 주인공은 식품회사의 「만년대리 이대리」. 회사에서는 쭉정이이자, 장모에게도 변변한 대접을 못받는 사위이지만 경마장에서는 살 맛이 난다. 그에게 경마장은 일상의 탈출구이다. 그렇다고 경마에서 늘 재미만 보는 것은 아니다. 정작 큰 돈이 필요해 맘먹고 베팅을 하면 경주마의 다리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그래도 이대리는 욕망의 배설장인 경마장을 떠나지 못한다.
「세일즈 맨」은 고졸의 20대 세일즈맨이 주인공. 「미스터 차」는 차 한대 팔기 위해 별별 애를 쓰는데 정작 그의 어머니는 『대학을 못나와 중매자리도 시원찮다』며 아들의 기를 죽인다.
「안개꽃 카페」는 실제 그가 자주 가는 광화문의 작은 카페를 모델로 한 것인데 외상 잘 주고 수더분한 40대초반의 마담과 주변 인물들이 엮어내는 일상의 스케치이다.
사실 허영만의 만화 세계는 일상보다 저만치 멀리 있었다. 80년대부터 그는 영웅을 찾아가는 먼 길을 걸어왔다.
「각시탈」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는 민족주의자 「이강토」가 있었다. 「무당 거미」와 「카멜레온의 시」의 주인공들은 우여곡절 끝에 권투 스타가 된다. 「48+1」에서는 「도성」이 출현하고, 급기야 「아스팔트 사나이」에서는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는 이강토 회장이 등장한다. 영웅이 나오지 않는 「담배 한개비」에서도 비극의 도는 평범을 훌쩍 넘어섰다. 눈물나는 감동이 있었지만 친근한 맛은 없었다. 「그의 이야기」일 수는 있어도 「내 얘기」일 수는 없었다.
물론 허영만의 변신에 「상상력과 문제의식을 잃어버린 중견작가의 변명」이라는 비난이 있을 수도 있다. 허영만 자신도 『아직도 남아 있는 만화사전심의 때문에 작가들이 스스로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이런 일상소재의 만화는 「슬램덩크」 「짱구는 못말려」 등 한국만화시장의 70%를 차지하는 일본만화의 대공세에 대한 한국만화의 자구책으로도 의미가 있다.
SF를 가미한 귀신이야기나 애어른의 성유희, 순정만화 등 다양한 일본 만화가 시장을 잠식하고 있고, 여기에 「베끼기」로 응수하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는 한국만화의 위기상황에서 「일상의 진지함」으로 승부하려는 허영만의 노력은 값져 보인다.<박은주 기자>박은주>
◎코주부에서 까치·둘리까지/만화주인공은 사회상 반영하는 ‘시대의 거울’
우리 만화의 주인공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늘 바뀌어 왔다. 해방 뒤 태어난 김용환의 「코주부」는 삼국지 속의 장수로 나서기도 했지만 6·25후엔 「반공투사」로 변신했다. 아무튼 만능 배우였던 코주부는 20년 넘게 인기를 누린 뒤 새세대 만화주인공에게 자리를 내준다.전후 세대들이 겪는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꿈을 찾는 청소년들에게 다가선 만화주인공들은 두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박기준의 「번개동자」나 임창의 「땡이」, 그리고 엄희자의 「순이」처럼 가난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어린 청소년상이다. 다른 하나는 서부 활극의 주인공을 그린 오명천의 「싼디만」, 산호의 「라이파이」처럼 신나게 싸워 이기는 씩씩한 주인공이었다. 특히 라이파이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향한 사회적 희망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청소년들에겐 새롭고 신비스런 미래세계를 맛보게 해주었다.
70년대 태어난 박수동의 「고인돌」은 놀랍게도 청소년들 뿐 아니라 30대 성인들까지 휘어잡았다. 개발 이데올로기와 독재의 억압으로부터 막혀있던 감정을 성애감정으로 치환해 풀어놓은 고인돌은 성인만화시대를 연 만화주인공이었다. 물론 고인돌은 못생긴 원시인이었고, 또한 성애 묘사도 은유법에 기대고 있어 결코 은근한 유혹의 금을 넘을 수는 없었다.
그런 한켠에선 승부욕으로 가득찬 또 한명의 주인공인 이상무의 「독고 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순진한 우정과 애틋한 사랑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것은 은밀한 욕망일 뿐이었다.
그런 독고탁이 불쑥 커버렸다. 바로 이현세의 까치 「오혜성」이다. 80년 광주의 어두움을 뚫고 들이닥친 오혜성은 청소년들의 우상이자 성인들의 꿈이었다. 그는 지옥같은 경쟁을 통해 성공하는 현대인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공포의 외인구단」을 이끄는 전설이기도 했다. 힘있는 것 만이 이긴다는, 자본주의 윤리의 화신인 오혜성은 대중의 욕망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하나의 환상이었다.
허영만의 「이강토」 또한 까치에 버금가는 주인공이었다. 때로는 「오! 한강」같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사회와 이념까지 건드리며 우리 만화의 수준을 한단계 높여 놓았다. 이들 주인공은 자극적인 연출기법을 동원한 이른바 극화체 성인만화였으며, 억세고 매끄러우며 폭발하는 속도감으로 80년대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다.
그런 가운데 옛 역사의 향기를 가득담은 백성민의 「장길산」, 이두호의 「임꺽정」이 우리 앞에 되살아났다. 또 한 켠에서는 맑은 감성을 한껏 아우르고 있는 이희재의 「악동이」와 이진주의 「하니」, 김수정의 「둘리」가 여전히 청소년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처럼 격렬한 시대에도 역사의 진지함이나 일상 속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만화 주인공들이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은 우리 만화의 두터움을 반영하는 것이다.<최열 만화평론가>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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