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이 붕괴를 향해 줄달음치면서 발악하듯 광기를 발할 때인 79년 7월1일.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골치 아픈 우방국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러 서울을 찾았다. 남북한간의 팽팽한 군사적 대치상태를 빌미로 긴급조치하에 강압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박을 설득하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두 사람은 정상회담뒤 「남북한 및 미국의 고위당국대표회의 개최」 등 5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소위 「3자회담」이라는 것이 한반도 긴장완화방안으로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이때다.
열흘뒤인 7월10일 김일성은 그들 외교부성명을 통해 『통일문제는 남북한 자신이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민족내부의 문제』라며 이 제의를 거부했다. 김일성의 생각으로는 남북한 통일문제에 제3자인 미국이 끼여들어 결과적으로 2대 1의 불리한 협상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김은 곧 생각을 고쳐 먹는다. 3자회담이 형식은 2대 1로 불리해 보이나 실질은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과 단독협상을 할 수 있는 절묘한 구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뒤늦게 이런 함정과 북한의 속셈을 발견한 정부도 3자회담안을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된다. 가뜩이나 북한은 83년 버마 아웅산묘소에서의 폭탄테러 직전인 그 해 10월초 북경(베이징) 미 대사관을 통해 자신들이 2대 1의 불리한 게임이라고 거부했던 3자회담안을 우리측에 거꾸로 제의해 오기까지 했다.
북한의 대남자세의 요체는 「한국상대 안하기」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만 따돌릴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한다. 잠수함이 침투가 아니라 표류라며 「백배천배보복」 운운하던 북한이 미국의 자제 요청(?)으로 잠잠해졌다. 사정거리 1,000㎞의 중거리 미사일 노동 1호의 실험발사 위협도 8일 미 국무부의 번스 대변인에 따르면 「미국의 촉구대로」 실험을 중단했다.
북한의 이런 「미국 직거래」방침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편리한 대로 이를 무시하고 왔다갔다 하다가 번번이 낭패를 본 쪽은 늘 남쪽이었다.<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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