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가족주의적 저신뢰사회’/재벌집중·부 불균형 등 신랄히 지적「인류사회는 최종목표를 향해 진화한다」는 헤겔, 마르크스적 의미의 「역사」는 끝났다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손을 힘차게 들어주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92년)으로 전세계적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그의 두번째 저작 「트러스트(Trust)」가 번역출간됐다.(구승회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간).
「사회도덕과 번영의 창조」라는 부제가 붙은 「트러스트」는 지난해 원저가 나온 뒤 한국경제에 대한 일부 비판적 내용이 소개되는 등 그간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새 저서에서 후쿠야마는 그의 주장대로라면 역사가 종언된 시대에, 유일한 체제로 살아 남은 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의 생명력을 북돋우기 위한 역동적 시민사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문제는 해결됐다. 남은 핵심적 문제는 사회적 자본의 보존과 축적이다』
그의 논의는 『인류는 이제 범세계적으로 민주주의-자본주의 외에 정치경제 조직의 대안적 모델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단정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이 하나의 제도적 틀 내에서도 사회에 따라 풍요의 정도나 삶의 만족도는 다르다.
후쿠야마는 그 차이는 바로 『한 사회에 지배적인 문화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신뢰」의 개념은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단체와 조직 내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이 한 사회의 신뢰수준을 높이고, 이것이야말로 경제적 도약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신뢰도에 따라 국가들을 고신뢰사회와 저신뢰사회로 구분한다.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은 「가족주의적」 저신뢰사회다. 이들 나라에서는 가족이 경제조직의 기본단위를 이룬다.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선 대규모 조직을 건설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견실하고 국제경쟁력이 있는 기업을 진흥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과 독일은 고신뢰사회다. 이들은 친족관계에 바탕하지 않은 대규모 기업 건설이 훨씬 쉬웠고 전문경영 방식에 쉽게 적응했다.
일본계 미국인 3세인 후쿠야마는 마지막으로 미국사회를 분석한다. 『미국인들은 자기네가 까다로운 개인주의자라고 믿고 있지만 실상 일본, 독일처럼 역사적으로 높은 신뢰에 바탕한 집단지향적 사회이다』 그는 미국이 날로 증가하는 소송과 범죄 등으로 인한 신뢰의 쇠퇴를 막기 위해서는 근대적 합리성만이 아니라 호혜성, 도덕률 등 「전근대적 문화관습」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관심있는 부분은 한국경제를 보는 그의 시각. 이 책 12장 「한국의 대기업, 그 내면은 중국형」에서 그는 『한국은 대형기업과 고도로 집중화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독일 미국과 유사하지만 가족구조에 있어서는 일본보다 중국에 훨씬 가깝다』며 다른 나라와 현저히 구별되는 특수한 경우라고 진단했다. 후쿠야마는 이어 극단적 재벌 집중, 정부의 경제 개입, 부의 불균형 등을 섬세하지는 못하나마 신랄하게 지적한다.
후쿠야마의 전체적 논지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경제계의 소위 다운사이징 몸살, 조기퇴직 바람 등으로 겨울이 더 춥게만 느껴지는 요즘,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의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되새겨봄직하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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