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록 그리움 더하는데/수업중 시상 고뇌하시던 정 선생님 모습 눈에 아른고향을 등지고 38선을 넘은지 어언 반세기. 고희의 언덕을 넘고 보니 이제는 폐장에서 눈물이 스며 나오듯 끝모를 그리움에 숨결이 높아진다.
나의 살던 고향은 봉산탈춤으로 유명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인심 좋은 봉산」으로도 삼천리 강산에 알려져 있다.
향수란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몫일 것이다. 순진무구했던 시절에 뛰놀던 메와 산새들 소리, 드넓은 황금빛 벌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메뚜기들, 실개천에서 물장구치던 동무들. 지금은 아득히 사라져 낡아가는 영상들이다. 그래서 더욱 붙들고 싶은 노령의 절박한 심경이 스스로 안쓰럽다.
나는 해를 거듭할수록 정지용 시인의 「고향」을 좋아한다. 여기에 악곡을 붙인 채동선의 노래는 한층 애절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집에 돌아오는 외로운 골목길에서 눈물섞인 한숨과 함께 불러보는 이 노래는 나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일제 말기 서울의 휘문중학교를 다닐때 정지용 선생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원래 조선어 담당이었지만 내가 1학년때 조선어 말살정책 때문에 과목이 폐지되면서 선생은 서툰 발음으로 영어를 가르치셨다. 시험때 정선생님이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시면 모두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선생님은 시험지를 앞줄 학생에게 던져주고는 조각처럼 서서 멀리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학생들이 커닝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창밖 높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은 시상의 삼매경에 잠기는 듯 했다. 어쩌면 두고 온 고향의 어린시절 모습을 하늘을 스크린삼아 몽유하는 듯 보였다. 가끔 느닷없이 뜻모를 웃음을 얼굴에 올리면 학생들은 그것이 우스워서 함께 웃었다. 선생의 별명은 「신경통」이었고 학생들은 시인으로서의 존경심없이 그저 「신경통」으로 철없이 불러댔다.
정선생님은 다른 교사들처럼 야단치는 법이 없었고, 권위를 지키려 하지도 않았다. 성적도 후하게 주는 무골호인이었다. 하루 종일 별 말씀이 없었고 그저 조용히 거동하는 성품이었다. 시상의 영감 속에서 부유하는 서정적 모습 뿐이었다.
이제 선생은 그분의 체질에 맞지않는 북녘땅에서 정신적 고통의 한을 품은채 주옥같은 시들만 남기고 영원히 우리곁을 떠나셨다. 그리던 고향의 산꿩과 비둘기들, 메끝에 인정스레 웃는 꽃과 풀피리도 다시 못보시고 높푸른 하늘 아래서 고이 잠들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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