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사회는 변할 것이라고…지난달 27일 하오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한 맥주집에서 조촐한 일일호프가 열렸다. 80평 규모의 내부에는 시끄러운 댄스음악이 흐르고 20·30대 젊은이 50여명이 밝은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얼핏 보아 대학생들이 흔히 여는 일일호프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맥주집 안팎 어디에도 행사를 알리는 안내문은 없었다. 또 남녀가 섞여 미팅을 하는 여느 모습과 달리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앉아 귀엣말을 주고 받는 모습이 색달랐다.
이 모임을 연 것은 남성동성애자 모임인 「친구사이」. 동성애자와 동성애를 이해하는 「게이 프렌들리」(Gay Frendly) 등 모두 1,000여명이 이날 행사장을 찾았다. 「친구사이」는 최근 일기 시작한 공개적인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구심점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모임도 운동 확산을 위한 기금마련 행사였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온갖 수모를 당할 것이 뻔한 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까지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사이」 회장 김준석씨의 말이 그 대답이 될 것 같다. 『지금까지 한국에는 동성애자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존재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실체를 부인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은 동성애자들이 결집된 목소리를 통해 존재를 인정받고자 결성한 것입니다. 동성애자는 범죄자도, 변태도 아닌 「약간 다른 사람」일뿐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려고 합니다』
이들의 활동 덕분인지 경멸이 담긴 「호모」라는 말 대신 게이(남성동성애자)와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이란 말이 사회적으로 자리잡았다. 또 동성애에 대해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는 현상」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일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서울대 동성애자 모임이 올해 이름을 「마음001」에서 「마음003」으로 바꾼 것도 이런 변화의 결과일 수 있다. 001이나 003 등은 「이성애자」의 인권을 100으로 볼 경우 동성애자의 인권지수이다.
이같은 변화는 일천한 국내 동성애 모임의 역사로 보아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다. 국내에서 첫 동성애자 모임 「사포」가 발족한 것은 91년. 고대 그리스 레즈비언 시인인 사포의 이름을 딴 이 모임은 주한 외국인과 재미교포 레즈비언들로 구성됐다. 「서로 얼굴이라도 알고 지내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이 모임은 올해서야 비로소 이름을 공개하고 국내 동성애자 단체들과의 연대활동에 나섰다.
내국인들로만 이뤄진 첫 동성애자 모임은 「사포」의 영향을 받아 93년 겨울 결성된 「초동회」. 레즈비언과 게이의 공동모임이었던 초동회는 1호 소식지를 통해 공개적인 운동으로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비뚤어진 인식을 바로 잡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남녀 회원간의 견해 차이로 제대로 날개를 펴지 못하고 두달만에 「끼리끼리」(레즈비언)와 「친구사이」(게이)로 나뉘었다.
94년 2월 「친구사이」를 만든 게이들은 『기존의 낙원동 게이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해 공개적인 대화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들은 매일 저녁 서울 연남동 사무실에서 동성애 관련 비디오를 감상하거나 여러가지 취미 소모임을 갖고 있다. 또 비회원을 대상으로 동성애나 에이즈 상담 서비스도 하고 있다.
정규 회원 50여명에 회원은 아니지만 사무실에 들르거나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120여명에 이른다. 20대 초반∼30대 중반의 회원중 대학생이 약 45%정도이고 나머지는 회사원이나 자영업 등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졸이상의 고학력자가 90% 가량이다.
기존 낙원동·이태원 문화를 토대로 비교적 쉽게 조직을 이룬 게이들에 비해 레즈비언들은 모임을 만드는데 한층 어려움을 겪었다. 여성 동성애자 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는 94년 11월 현 회장인 전해성씨(29·가명)를 비롯한 5명의 회원으로 첫발을 디뎠다. 현재 회원은 120여명이고 서울 아현동에 사무실이 있다.
이처럼 동성애자들은 이제 얼굴을 드러내고 나름대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까지 사회적 편견의 벽은 두텁고 전망도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신원 노출에 거부감을 표하는 회원들이 많고 인권운동은 시기 상조라는 인식이 무성하다. 「마음003」의 상담역 김정수씨(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는 『동성애 운동의 이론을 제공해야 할 대학모임조차도 운동단체라기보다 피난처 성격이 강하다』고 토로했다.
서울 낙원동과 이태원 등의 게이바에 출입하는 게이들과의 관계설정도 동성애 모임의 딜레머다. 이태원에서 게이바를 운영하는 조모씨(27)는 『대학생 게이모임은 동성애자 전체의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몇명이 눈에 띄는 활동을 한다고 게이들의 처지가 나아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서울대 김정수씨도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적정 수준의 인권을 획득하는 데는 5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를 비롯한 동성애 인권운동가들은 비관론에만 빠져 있지는 않다.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시대 추세에 따라 소리없이 활동한다는 것이 우리들이 택한 생존방법이다. 사회 전체의 인권이 신장하면 동성애자의 인권상황도 자연스레 개선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늘 그래왔듯이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이상연 기자>이상연>
◎대학가 동성애모임 ‘음지에서 양지로’/PC통신·소식지 발간 등 홍보활동 활발
최근 동성애자 얼굴 내밀기 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대학내 동성애 동아리다. 대학 동성애자 모임의 확산은 붐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할 정도다.
지난해 학보에 광고까지 내며 당당하게 출발했던 연세대 「컴투게더」에 이어 서울대 「마음003」과 고려대 「사람과 사람」이 잇달아 발족했다. 각 모임은 대개 15∼20명의 남녀동성애자들을 회원으로 하고 있다.
처음 대학모임은 소위 명문대 중심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지적 허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올해만 해도 충북대의 「동일인」, 건국대의 「화랑」 등이 결성됐다. 최근 외국어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동성애 모임의 필요성을 알리고 회원을 모집하는 글이 PC통신망 게시판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얼굴없는 공간인 PC통신망에서도 동성애자들의 세력화는 두드러진다. 하이텔의 「또 하나의 사랑」, 천리안의 「길벗」, 나우누리의 「레인보우」 등 3대 통신망에 예외없이 동성애자 모임이 있다. 하이텔 모임의 회원수만 120여명. 채팅으로 동성애자의 고민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고 정기적인 모임도 활발해 회원들이 점점 느는 추세다. 남성 동성애자 모임 「친구사이」는 내년 2월께 자체 홈페이지를 만들어 본격적인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만의 의사소통 수단인 소식지도 발간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에 있어서 「친구사이」가 내는 격월간 「친구사이」는 일간지보다 유용하다. 낙원동과 이태원의 거의 모든 게이바에 비치돼 있다. 게이바에 드나드는 동성애자들은 12호째 발간된 이 소식지를 이제 문화교양지로 인식하고 있다. 게이의 수기나 문학작품, 게이를 주제로 한 영화이야기, 에이즈 관련 상담 등이 주내용이다.
여성동성애자들에게는 「끼리끼리」가 만드는 계간지 「또다른 세상」이 있다. 남성 동성애자와는 달리 낙원동 등의 외부 독자가 없는 탓인지 「친구사이」보다 학술적이고 진지한 내용이 많다.
전화음성 사서함인 153서비스도 최근들어 새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친구사이」나 「끼리끼리」 등이 153서비스를 통해 동성애 관련상담이나 에이즈 예방교육을 실시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친구사이의 153 이용빈도가 전체 서비스 가운데 상위권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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