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직도 희망을 꿈꾸며…/동성애자 수기
알림

아직도 희망을 꿈꾸며…/동성애자 수기

입력
1996.11.09 00:00
0 0

◎이해솔씨/28세·방송구성작가/나의 선택이 아닌 자연스런 내모습/그러나 둘만의 사랑은 언제나 벽에…내가 이성보다 동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주 어렸을 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애들보다는 여자애들에 더 관심이 가고 여자애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고민거리는 아니었다.

중학교때 사춘기를 맞아 내가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변의 친구들은 남자친구니, 미팅이니 하며 즐거워할 때 나는 왜 남자보다 여자가 좋을까 고민했고, 그것은 소외감으로 이어졌다. 성교육 시간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왜 늘 변태니, 호르몬 분비가 잘못됐느니, 성도착증이니 했던 것일까. 그러니 자신이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결코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고민하거나 좌절하거나 자학할 여유가 없었다. 진학문제가 더 급했다.

대학에 들어와 나는 같은 과의 한 여자친구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깊은 관계였다. 사랑의 기쁨과 행복도 맛보았다. 그러나 주위 친구들의 의심스런 눈초리는 부담스러웠다. 우리 둘은 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한 친구에게 우리 둘사이를 털어 놓았더니 눈물까지 흘리며 걱정하고 만류했다. 그러나 동성애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내 생의 초기부터 형성된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결국 충고를 따를 수 없었던 나는 그 친구와 불편한 사이가 됐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친구를 잃어야 했던 것은 대학시절의 가장 큰 슬픔이었다.

그 후 나는 누구에게도 내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과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동성애에 대한 고민과 갈등도 깊어졌다. 어떤 학자는 뇌의 구조와 호르몬의 분비를 들먹이며, 또 어떤 학자는 프로이트의 연구를 내세워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설을 주장했지만 그 어떤 것도 일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동성애가 역사 이래 존재해 왔으며 다만 시대와 나라에 따라 평가와 이해의 정도가 달랐다는 주장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세상의 정상·비정상을 국가권력이 정한다는 미셀 푸코의 논리에 접하면서 나는 동성애 역시 다수 이성애자의 박해와 억압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 비로소 「동성애자=비정상」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대학 졸업후 프리랜서 방송 구성작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때의 애인과 헤어지고 새 여자친구도 만났다. 사랑만 있으면 어떤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으리라는 우리의 믿음은 5년만에 난관에 부닥쳤다.

연신 집에서 결혼얘기가 나오고 중매니 맞선이니로 고통받던 중에 우리 사이가 애인의 가족에게 알려졌다. 결혼 압박에 못이겨 애인이 실토해 버린 것이었다. 애인 오빠가 찾아와 관계청산을 요구하면서 진정 사랑한다면 친구가 좋은 남편 만나 결혼해서 애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빌어 달라고 부탁했다. 간절한 부탁을 물리칠 수 없었다. 애인을 오빠와 함께 떠나 보냈다.

그일로 자신감만으로는 떳떳하게 살 수 없음을 느꼈을 무렵 레즈비언 인권모임인 「끼리끼리」를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레즈비언들이 저마다 가슴아픈 사연들을 안고 모여 들었다. 서로 아픈 상처를 어루 만지고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견뎌보자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대로 자유로이 살 수 있고 동성애라는 것이 억압과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는 세상을 위해, 또 많은 레즈비언과의 공동체적인 삶을 위해 여기서 일하고 있다. 여전히 희망을 꿈꾸며…

◎어떻게 볼 것인가/긍정 부정 이전에 열린 공간서 논의돼야

동성애자들의 세계는 일반인의 인식틀로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분명히 숨쉬며 살고 있고 결혼까지 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묻어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비난의 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있으나 동성애를 하나의 성표현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연세대 조혜정 교수(사회학)는 『동성애 문제는 매우 복잡한 윤리적 판단을 요구하지만 윤리 기준도 시대상황에 따라 바뀐다』며 『개인의 성적 경향이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성애자들의 삶이 고립되고 죄인시 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동성애자들은 소수자로서의 권리찾기 운동을 「이반 운동」이라 부른다. 일반의 상대적 개념으로 채용한 말이다. 이성애자들의 횡포와 편견으로부터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 「끼리끼리」의 회장 전해성씨는 『동성애자 인권 운동은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애도 성표현 방식의 일종일 뿐이며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들처럼 당당히 살아 갈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전경수 교수(인류학)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동성애에 대한 긍정과 부정 이전에 성과 사랑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열린 공간에서 자연스럽고 광범위하게 논의돼야 한다. 그러면 동성애 문제의 해결 방향이 찾아질 것이다』

◎용어정리/이반:일반인과 구별 남녀동성애자 전체 지칭

◇이반―동성애 인권운동가들이 남성과 여성 동성애자 전체를 가리키는 말. 일반인과 다른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이반운동(동성애 인권운동), 이반 공동체 등으로 쓰인다.

◇호모(섹슈얼)―영어로 동성애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같은 남자」를 가리킬 때 쓴다. 흔히 낙원동이나 이태원 업소에 출입하는 동성애자들을 업신여겨 부르는 말로 사용된다.

◇게이·레즈비언―남성·여성동성애자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 영어로 「즐거운」 사람들인 게이는 경멸의 뜻이 담긴 「호모」라는 말대신 사용된다. 흔히 이태원의 여장 남자클럽을 게이바라고 부르는데 실은 낙원동이나 이태원 등지의 동성애자끼리 모이는 업소를 게이바로 불러야 정확하다. 레즈비언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레즈비언 시인 사포가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했던 「레스보스」섬이다.

◇트랜스(젠더)―성전환수술을 통해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생물학적 성을 바꾼 사람을 뜻한다. 또는 남성이면서 화장을 하고 여자 옷을 입는 등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을 칭하기도 한다. 이태원 등지의 여장남자 클럽이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다.

◇커밍 아웃―글자 그대로 「밖으로 나오는 것」이란 뜻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커밍아웃은 흔히 매스컴을 통한 얼굴공개로만 이해되지만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리는 것도 일종의 커밍아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