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원·공관원 등 합법적 신분 위장/국내 거주 외국인중 400여명 주시대상/‘나는 수법·기는 보안’ 당한줄도 몰라국제 산업스파이들이 서울로 몰려오고 있다. 국내 기업의 첨단기술이 소리없이 새나가고 우리 경제가 알게 모르게 멍들고 있다. 선진국은 빼낸 기술과 사업정보를 국제입찰과 시장개방 압력에 활용하고 개도국은 이를 바로 상품화, 우리 기업을 위협한다.
92년 경남 창원의 스탠드 생산업체인 S사는 특허절차를 밟고 있던 신제품이 중국에서 헐값으로 제작돼 반입되는 바람에 도산했다. 상품 제원이 똑같아 특허자료가 새나갔음을 확신했으나 유출경로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처럼 국제 산업스파이의 소행이 분명한 정보유출사건이 잇따르고 있으나 워낙 수법이 교묘해 흔적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해 국가안전기획부의 한 간부는 취재팀에 『현재 400여명의 국내 거주 외국인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90년 이후 확인된 국제 산업스파이 피해가 6∼7건에 불과할 만큼 이들의 신원과 활동내역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국제 산업스파이를 특정하기 어려운 것은 절대 다수가 상사원, 공관원, 언론사 특파원, 컨설팅 회사원, 관광객, 산업연수생, 합작투자 및 공동연구 요원 등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쟁 상대인 중동지역의 한 국가는 주한 대사관이 직접 나서 자국 기업진출 확대를 위한 경제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기까지 한다. 100만명에 이르는 국내거주 외국인 중 누가 산업스파이인지를 가려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이에 따라 산업스파이 피해 방지는 개별기업의 몫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산업보안 의식은 아직 걸음마 단계여서 날로 첨단화, 다양화하는 산업스파이의 손길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중소기업은 물론 독자적인 보안책을 서두르고 있는 대기업도 해를 입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다만 기업이 명예와 공신력을 고려, 정보 유출 피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 관계당국의 설명이다. LG그룹의 한 중역은 『국내기업의 정보유출 피해중 드러난 것은 전체의 5%도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보 유출을 사후에라도 바로 알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첩보영화에서나 나오는 첨단장비를 이용한 사진촬영, 도청, 복사와 컴퓨터 해킹, 무선전화 및 팩스 교신내용 해독 등으로 정보가 유출돼 똑같은 상품이 외국에서 복제, 시판되고서야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국제 산업스파이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 수백, 수천가지 수단을 활용한다. 94년 낯선 남자에 매수된 미화원이 대기업체 간부의 구두 뒤축에 도청용 송신기를 달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국의 국제 산업스파이 활동 유형 분석에 따르면 매수나 약점을 이용한 협박, 취업 약속을 통해 내부자를 조종하는 것이 가장 흔한 수법이다. 산업시찰단도 요주의 대상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구역에서 선글라스나 넥타이, 라이터, 시계 등에 교묘히 숨겨진 소형 특수카메라를 이용해 필요한 정보를 빼간다. 신발에 자석을 달아 바닥의 금속가루를 수집, 신소재 성분을 분석하거나 화학공장 시찰도중 넘어지는 척하며 생산라인의 화학물질에 넥타이를 적시는 경우도 있다.
해외출장 때는 더욱 주의를 요한다. 중요한 출장 때는 반드시 호텔방과 여행가방은 물론 비행기 좌석에 이르기까지 도청장치 설치 여부를 검색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호텔방은 1층을 피하고 프론트 직원이 객실 번호를 다른 사람에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면 다른 방을 구하는 것이 좋다. 극히 중대한 사업일 경우에는 중간에 호텔을 갑자기 바꾸라는게 전문가들의 충고다.<유성식 기자>유성식>
◎국내기업 피해사례/미인계·위장취업… 007 뺨친다/매력남 미끼 여직원 유혹 정보사냥/컨설팅·공동연구제의 핵심정보 슬쩍/미화원 매수 구두 뒤축에 도청기 부착
「M산업 무역부 H양은 서류를 정리하고 팩스 수신과 복사를 담당하는 직원이었다. 평소 차분하고 상냥한 성격으로 직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몇년간 공들여 추진했던 수출상담을 외국 P엔지니어링에 빼앗긴 M사는 내사 결과 놀랍게도 H양이 회사기밀을 빼돌려 온 사실을 밝혀냈다. H양은 1년전 P엔지니어링 한국지사 영업과장 Q씨를 만나 그의 말끔한 외모와 구김살 없는 태도, 유창한 영어에 매료됐다. 사랑에 눈먼 H양은 1년 넘게 그가 시키는 대로 모든 무역관계서류를 복사해 가져갔다. 유럽지역 전자부품구매서류, 미주지역 물품견본서와 수출서류, 수출품목 가격 수량 선적일이 적힌 바이어용 목록표…」
국제 산업스파이는 국내기업의 보안 불감증 틈을 비집고 온갖 수법을 구사해 정보를 빼간다. 컨설팅사를 통해 통째로 정보를 쓸어가기도 한다.
전자업계 중견업체인 B기업은 최근 미국의 한 경영컨설팅사로부터 새로운 경영전략수립을 위한 컨설팅 제의를 받고 필요한 경영현황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미 컨설팅사는 경영자료외에 중요기술정보와 해외거래처 등 방대한 자료를 함께 요구했다. 충실히 모든 자료를 제공한 B사는 얼마후 회사기밀이 외국 경쟁업체에 새나간 사실을 알고 후회했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다.
생명공학 연구기관인 M연구소는 유용성 균주와 유전자 재조합기술에 의한 변환균주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얼마 안 있어 호주 Y연구소가 관련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며 기술이전과 상품화 기반 구축 공동연구를 제의해 왔다. 기술도입계약을 위한 제안서가 오가면서 Y연구소측은 자기측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개발기술 정보를 요구했다. M연구소 연구원들로부터 연구진척상황과 내용 등을 입수한 Y연구소측은 기술이전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M연구소는 뒤늦게 유출사실을 깨닫고 협의를 중단했지만 이미 늦었다.
93년 1월 스피커전문 제조업체 S기업 사장 Y씨는 한동안 함께 일했던 호주인 릭 보튼을 라스베이거스 전자쇼 행사에서 만나 깜짝 놀랐다. 한달전 아내의 신병치료를 위한 휴가를 신청했던 그가 어찌된 영문인지 일본 오라(AURA)사 명찰을 달고 판촉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조사결과 그는 92년 10월 일본 스피커업체 오라사로부터 S기업의 영업비밀 제공을 조건으로 연봉 7만달러에 비밀스카우트돼 S기업 전산실에서 설계도면과 신규개발 모델의 가격 등 기밀을 빼낸 것이 확인됐다. Y사장은 얼마후 내한한 릭 보튼을 붙잡았으나 엄청난 손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91년 10월 LPG 등 고압가스용기 제조업체인 D단조사는 관광비자로 입국한 인도네시아인 기능공 스티븐슨을 단기고용했다. 주조 및 단조 밸브라인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그에 대한 사장의 신임은 두터웠다. 92년초 술자리에서 그는 사장에 고압밸브 접착방법을 몰라 작업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고 사장은 기특한 마음에 아무런 경계심 없이 회사의 핵심 기술을 설명해 주었다. 며칠후 가족문제를 핑계로 스티븐슨은 한국을 떠났다. 그는 현지 금속회사 사장의 아들이었고 핵심단조 접착기술을 알아내기 위해 위장취업한 것이었다.
홍콩의 카스테레오 업체인 엘틱사와 라이텍사는 92년 한국기술자들을 빼내기 위해 국제 인력브로커들을 동원, 집요한 스카우트전을 전개했다. 스카우트된 20여명의 설계·생산 기술자들은 이들의 요구로 생산기술정보, 신제품 설계도면, 해외거래처 등 영업정보까지 빼갔다. 1년후 엘틱사는 ETR(전자 튜너)방식의 카오디오를 생산, 저가로 동남아시장에 내놓았고 한국업체들은 수출이 30%이상 격감, 큰 타격을 받았다.
무역업체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R씨는 특수바늘 생산업체인 W상사 기술상무로 일하는 형을 끌어 들여 이 회사의 특수바늘 기술도면과 최신제품을 빼내고 해외거래처 영업서류까지 챙겼다. 이들이 중국 산둥성에 설립한 합작기업은 두달후 W상사와 동일한 제품을 4분의 1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W상사는 부도직전까지 몰리는 극심한 경영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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