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좌절하는 ‘우리의 자화상’/무명배우 9년만에 맡은 주연/암울한 현실의 이발사역 열연연극인 박철민씨(31)는 요즘 날마다 가슴앓이를 한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버림받아 끝내 미쳐버린 「조만득」씨를 매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조만득은 극단 아리랑이 아리랑소극장 개관기념으로 올리는 연극 「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의 주인공. 서울 변두리 「행복이발소」의 이발사인 그는 자신을 조여오는 암울한 현실 ―치매증 환자인 노모, 노름에 빠진 동생, 단란주점 사장과 바람난 아내― 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린다.
연극판에 뛰어든지 9년. 변변한 배역 한번 맡지 못하고 열정만으로 버텨온 무명배우 박씨에게 조만득역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이자 부담이다. 「배꼽춤 …」는 지난해 서울연극제에서 최우수작품상, 연출상 등을 석권하고 38일만에 1만2,000명의 관객을 모았다.
한없이 성실하고 착하지만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 조만득은 박씨와 많이 닮았다. 대학시절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던 박씨는 졸업하자 마자 동숭동 사람이 되었다.
「노동의 새벽」 「직녀에게」 등 30여편의 무대에 서면서 그는 「생활」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가장 서럽게 한 것은 생활고나 무명배우의 아픔이 아닌 외로움이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무대를 올라야하는 배우의 참담함. 한국 연극의 메카 동숭동을 휩쓸고 있는 포르노 바람은 순진한 연극쟁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관객을 빼앗아 가버렸다.
자신을 백만장자라고 믿는 과대망상성 정신분열증 환자인 조만득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왔으나 결국 어머니를 칼로 찌르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간다.
『수정아, 나는 이 시상에 태어나 하고자픈 일을 내 마음대로 단 한번도 해본적이 읍써야. 나는 바보여…』 조만득이 제 정신이었을 때 동료환자 수정에게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는 이 대목을 연습할 때마다 인고의 세월을 지낸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형님이 떠오른다는 박씨.
이청준 원작, 김명곤 연출의 이 무대는 내년 1월5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아리랑에서 볼 수 있다. 741―6069<박천호 기자>박천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