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강릉행 통일호를 타고 약 4시간만에 증산역에 내린다.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정선군 남면. 마을외곽에 위치한 증산초등학교 정문 건너편에 민둥산 등산 코스의 안내판이 붙어 있다. 등산로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안내판에 쓰인 민둥산의 높이는 1,119m, 산정까지의 거리가 3.2㎞, 소요시간 1시간. 산길은 초입부터 가파르다. 군데군데 억새풀이 이 산의 테마를 전주하듯 하느적거린다. 산간의 발구덕마을 곁을 지나고 산마루에 가까워지면서 길은 다시 급경사가 된다. 숨을 헐떡이며 한 등성이에 올라서자 가쁜 숨이 헉 멎는다. 온통 하얀 억새밭이다. 정상이 바로 눈앞에 바라 보인다. 정상까지 억새밭 사이로 골목같은 길이 외줄기로 뻗었다. 사람 키를 넘어서는 억새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등산객들을 환영한다.민둥산 꼭대기는 산 이름 그대로 민둥 민둥하다. 까까머리처럼 나무 한포기 없다. 대신 억새밭이 빙 둘러쌌다. 내려다보니 산 주위 비탈들이 은백의 억새풀로 장관이다. 백설 덮인 산정에 선것 같다. 일대의 억새밭이 30만평에 이른다고 한다.
둘러보면 태백산맥의 연봉들이 막 한창 철이 지난 단풍의 잔광으로 불그레하다. 저 아래로 증산 마을의 좁다란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고 태백선과 정선선을 다니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산협에 반향되어 산 위까지 지척에서처럼 들린다. 아무도 따뜻이 길러준 적이 없는 이 산의 억새풀들은 아마도 저 기적소리에 잠이 깨어가며 절로 자랐으리라. 꼿꼿한 줄기 끝에 매달린 억새의 빗자루와도 같은 꽃이삭들이 바람에 한들거리며 티 하나 없이 맑은 가을 하늘을 부질없이 쓸고 있다.
증산에서는 지난 10월27일 제1회 억새풀축제가 있었다. 이날 각지에서 온 2,000여명의 등산객들이 처음 열린 억새잔치에 참가해 민둥산에 올랐다.
민둥산은 해발 1천미터가 넘는데도 지도에 없는 무적의 산이다. 그래서 이름도 산 모양따라 주민들끼리 사사로이 그렇게 불러온다. 이 무명산이 무명초나 다른 없이 야산에 버려진 억새풀밭 하나로 명산이 되어가고 있다.
억새는 우리나라 전역의 산야에서 자란다. 9월에 꽃이 피기시작하여 10월에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대중가요에서도 <아 으악새(억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하고 노래하듯이 가을 풍정의 하나로 친근하다. 전국에는 군락지가 많다. 전남 영암의 월출산 같은 곳도 한때 억새의 명소였지만 자꾸 번식시키자면 늦가을에 불을 질러주어야 하는데 산불방지에 묶여 억새가 차츰 줄어간다. 민둥산도 불로 사를 수 있으면 봄에 많은 산채 소득을 올리고 가을에 더 풍성한 억새밭을 구경할텐데하고 주민들은 안타까워 한다. 아>
옛날에는 초가 지붕에 얹히고 사료로도 쓰이던 억새가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는가보다 했더니 오히려 관상용으로 대접을 받아 꽃꽂이로 꽂히고 억새밭은 관광명물이 되어가고 있다.
억새는 동양적인 식물이다. 원산지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기다란 모가지는 동양적인 사유상을 하고 있다. 억새는 생각하는 풀이다. 억새밭은 광활한 사색의 뜰이다. 사색의 계절 가을에 억새밭에 서면 모두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억새밭은 그 허허한 풍경이 태고의 원야를 연상시킨다. 자연의 밑그림과도 같은 소슬한 색조가 인간사회의 시원을 생각하게 하고 인간의 본연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억새는 사람들더러 하얀 소심을 가지라 한다. 인간성은 때묻었고 인심은 탁해졌다. 부정과 부패, 타락과 부도덕으로 얼룩진 사회를 말갛게 세탁하라 한다.
가식도 분식도 없는 이 황원의 야초는 우리에게 절제와 질박을 가르친다. 억새 앞에서는 허욕이 가라앉고 허세가 숨죽는다.
억새의 성시는 단풍과 철이 비슷하다. 가을산에는 단풍과 억새의 경염이 있다. 화려한 단풍앞에 너무나 수수한 억새는 무색하기만 할 것인가. 단풍의 사치앞에 억새의 검소는 부끄럽기만 할 것인가. 민둥산에는 단풍 든 산을 두고 억새를 찾아가는 긴 산행의 행렬이 있었다. 7색의 태양 광선은 모이면 무색이다. 아무 채색도 없이 화사한 억새야말로 사치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이 가을날 진세를 잠시 떨쳐버리고 산야의 억새밭을 찾아가자. 오늘날 우리 사회가 깨우쳐야 할 많은 암시들이 거기 있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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