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변화인가/시대의 화합인가/대중과 야합인가80년대 「민중작가」란 이름으로 다가왔던 두명의 화가가 사십줄에 들어서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했던 시절에 대한 보상일까. 아니면 관객의 눈이 변한 것일까. 세월은 이 두사람에게 특별히 너그러웠나 보다.
판화작가 이철수(42). 지난해 서울 인사동 학고재화랑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30∼40만원씩 하는 그의 판화들이 400점 가량 팔렸다. 작가에게 돌아가는 몫은 1억원이 못되지만 관객들의 반응으로 보나, 판매량으로 보나 큰 성공이다.
최근 문학동네에서 내놓은 내년 달력 「자연을 닮은 집」이나 판화엽서집, 시화집 등도 인기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까요. 이제 사회의 분배에 관련한 것들보다는 정신의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80년대의 작업을 보면 그 시대에 더 절박하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도 되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미술이 받아들여 질 것 같지도 않고, 내 자신도 그런 미술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의 판화가 가지는 매력은 손 끝에서 자유롭게 놀아나는 칼 맛과 생략, 축약의 선어에서 우러나는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이다.
그의 80년대 작품은 시대의 아픔을 새긴 것 들이다. 데뷔한 81년 서울 하월곡동 산꼭대기 돌산교회에 분단을 소재로 한 벽화를 그렸다. 83년 부터는 조선말기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기민행렬」, 동학 연작인 「갑오년 정월 말목장터에 농민들 모이다」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등의 목판을 팠다.
하지만 88년부터 불기 시작한 시대의 변화는 그에게 「민중미술」에 대한 생각을 돌리게 했고, 그는 「선의 세계」로 「전향」했다.
화가 임옥상(46)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80년 「일어서는 땅」에 빨간 색이 많아 학살의 땅 광주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렀던 그는 더 이상 「문제 작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절대 악과의 싸움의 시기는 이미 지난 것 아닙니까. 지금은 사회저변에 전선이 형성돼 과연 어디가 싸울 곳인지를 아는 것 부터가 어렵네요』
그는 여전히 「운동적」 정서를 가지고 있지만 낮지 않은 가격의 작품들이 전시 때마다 꾸준히 팔리고 있다. 웬만한 대형 전시는 물론 「국가사업」인 광주비엔날레에도 그의 작품이 걸렸다. 흙에 물감을 부어 부조를 떠내는 일련의 부조 작업, 시대 보고서인 포스터작업 「삼풍도」와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3김 게임」, 그리고 최근의 작업인 「우리시대의 50인물 부조상」까지 그는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두 작가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드러냄」의 미학을 지향하는 임옥상은 공공미술 분야에 진출하고 싶은 게 꿈이다. 권위적 도시의 미학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것이다.
세상과의 연결 코드를 더욱 확장하려는 욕심은 「은자의 미학」을 추구하는 이철수 역시 같다. 그의 엽서집, 시화집 등 인쇄물 작업은 주변의 사소한 장면에 대한 미적 포착이나 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움으로 일반 대중의 품 속에 파고 들려는 작가의 꿈꾸기이다.
「민중미술」의 토양에서 자양분을 받아 자랐고 이제는 대중의 갈채를 받는 두 작가. 이들의 성공은 작가 정신의 변화인가, 시대의 화합인가, 대중과의 야합인가. 아직 대답을 내릴 시점은 아닌 것 같다.<박은주 기자>박은주>
□약력
◆이철수
54년 서울 출생·42세
고교 졸업후 몇년간 막노동판 생활
81년 첫 개인전이후 개인전 7회
86년 충북 제천 박달재 이주, 농민생활
◆임옥상
50년 부여 출생·46세
74년 서울대 미술대학원 졸업
79∼92년까지 광주교육대학, 전주대 미술학과 교수
94년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 「새야 새야 파랑새야」전
95년 광주비엔날레 「삼풍도」 「3김게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