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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정구영 서울여대 총장(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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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정구영 서울여대 총장(한국논단)

입력
1996.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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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호 전 국방장관의 뇌물수수사건으로 한동안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이제 좀 잠잠해지려나 했더니 국회의 대정부 질의과정에서 정부의 고위 공직자나 그 자녀들의 군입대 면제율이나 방위병으로 빠지는 비율이 평균치보다 훨씬 웃돌고 있다는 뉴스가 귓전을 때린다.이 뉴스는 얼마전에 읽은 어느 교수의 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 교수의 글에는 「신의 아들」이니 「장군의 아들」이니 「사람의 아들」이니 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언뜻보면 영화제목이나 소설제목같다. 그러나 실상은 영화나 소설제목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알고 나면 웃어넘기기도 찜찜하고 그렇다고 울어 버릴 수도 없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같은 단어들은 대학생들 사이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회자되는 것들로 군 입대를 완전히 면제받은 사람을 「신의 아들」, 지금은 그 제도가 없어진 방위병으로 입소판정을 받은 사람을 「장군의 아들」, 현역병으로 입대하게 된 사람을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고 있다.

○배경으로 군 면제

사나이로 태어나서 군대도 못 간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흠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수치스럽게 여겼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군대도 못 갔다 온 사람은 남자들끼리 하는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사람 대접도 제대로 못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사이엔가 끌끌한 배경이 있는 사람은 요리조리 빠져나가 군면제를 받고, 주로 평범한 소시민의 자녀들만 별 수 없이 몇 년의 세월을 군대에서 보내야 되는 것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셈이다. 굳이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다시 들먹이지 않더라도 북쪽에서는 공군주력기인 미그19기를 지난해보다 30대씩이나 더 늘리는 등 공군주력기와 병력을 증강하여 남한에 대한 기습공격을 강화하고 있다는 보도 등을 접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북한의 미그기가 30대 증가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니 「장군의 아들」이니 「사람의 아들」이니 하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런 말들이 우스갯소리라도 먹혀 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암담하게 느껴지고 두려운 것이다.

이스라엘과 아랍사이에 있었던 6일 전쟁이 생각난다. 인구 수백만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과 인구 몇억을 자랑하는 아랍과의 싸움이 벌어졌을때 많은 사람은 이스라엘이 큰 곤욕을 치르고 결국은 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워낙 상대가 되지 않는 전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을 깨끗이 뒤엎고 단 6일만에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6일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에 유학 중이던 이스라엘 학생들도 아랍학생들도 모두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이스라엘 학생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즉시 자기나라로 돌아갔고 아랍학생들은 군대 입영통지서가 날아 올까 두려워 빨리 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 나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군대에 가느냐는 질문에 한 이스라엘 대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제 자신을 위해서 전쟁터에 나갑니다. 제가 나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 민족이 또다시 비참한 역사 속에 놓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저의 장래도 보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저는 전쟁터에 기꺼이 나갑니다』

○국가와 공동운명

6일 전쟁이 끝난후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아랍진영에서는 사병의 희생이 많은데 비해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장교의 희생이 컸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민족과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투철한 국가의식은 피끓는 젊은이 뿐만아니라 장교들도 진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참으로 듣기에도 흐뭇하고 백번 부러운 모습들이다. 이런 투철한 정신이 있었기에 수억의 아랍진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가히 일당 백, 일당 천을 하고도 남을 믿음직한 모습들이다.

국가와 민족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말로만 외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삶을 통해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주인공이라고 외치는 자가 주인이 아니라 말없이 희생하고 헌신하되 대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도 않음은 물론 오히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다.

신체건강한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남성이라면 돈이나 권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스라엘의 대학생이 한 고백을 부끄럼없이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런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모들의 수효가 늘어난다면 21세기는 보다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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