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탐지기 감지했지만 유유히 남하/조장 무전지시에 잠수함 접안중 좌초/“혼자 월북” 결심 괘방산서 대열 이탈무장공비중 유일한 생포자인 이광수는 29일 기자회견에서 침투과정을 생생히 증언했다. 그의 증언을 토대로 잠수함의 동해안 침투과정을 재구성한다.
『(김정일)장군님께서 주신 명령을 관철하기 전에는 죽을 권리도 살 권리도 없으며 기어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겠습니다.』 9월 13일 밤 우리는 평양에서 극비리에 기지를 찾은 인민무력부 정찰국장 김대식 상장(우리 군의 중장급)에게 죽음을 각오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정찰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라』는 정찰국장의 짧은 한마디에 요원들의 얼굴이 한층 굳어졌다. 침투목적은 물론 침투일자도 모른채 연일 계속된 혹독한 훈련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정찰국장은 혁명의 일선에 나선 우리의 어깨를 일일이 두드리며 술잔을 건넸다.
14일 새벽 5시. 정찰국장과 악수를 나눈뒤 잠수함에 올랐다. 나를 포함해 승조원들은 함께 승선한 해상처장 등 고위급 간부까지 포함된 정찰조가 「특별임무」를 부여받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정찰임무와 관련해서는 어떤 얘기도 해서는 안되기에 그 누구도 정찰조에 침투목적을 묻지 않았다. 정찰조는 잠수함안에서도 자기들끼리만 식사를 했고 방도 따로 썼다.
승선이후 항해는 순조로웠다. 잠망경으로 주변을 살피며 엔진동력으로 남진했다. 첫 관문인 군사분계선 구간도 잠망경을 내리고 엔진을 끄는 등 평소 훈련대로 별 문제없이 통과했다. 동해는 수심별로 온도차가 커 잠수함의 경우 소음탐지기(수중탐지장치)에도 잘 걸리지 않는 만큼 적(우리해군)의 추적을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군사분계선 주변에서 적 함정이 보내는 탐지파를 감지했지만 바다밑으로 유유히 침투했다. 강릉에서 각각 5마일(8㎞), 1㎞ 떨어진 지점에서는 잠망경을 올려 주변을 정찰했다.
15일 상오 1시. 강릉의 해변에서 3백∼4백m 떨어진 목적지에 잠수함이 정박했다. 이어 하오 8시, 정찰조 3명을 육지에 침투시킨뒤 잠수함으로 돌아왔다. 이틀간의 대기생활중 17일 하오 9시께 안내조장이 다급하게 『파도가 세니 해안 가까이 잠수함을 이동시키라』는 무전을 보내왔다. 서둘러 후진해 육지쪽으로 접근했으나 잠수함이 파도에 휩쓸리면서 좌초했다. 큰 일이었다. 모두들 잠수함을 빠져나왔다. 괘방산으로 허겁지겁 올라갔으나 피로와 허기가 겹친 탓인지 안내조장 등이 『배 고파서 못 올라가겠다. 여기서 싸우다 죽자』며 도주를 포기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일. 혼자서라도 월북하겠다고 마음먹고 대열을 빠져 나왔다. 이곳 저곳을 헤매던 중 18일 하오 4시30분께 물을 얻어 마시기위해 (강릉시 강동면 모선리)민가에 갔다가 붙잡혔다.
□무장공비 잠수함 침투 일지
9.13 저녁 정찰국장 지령·격려
9.14 05:00 낙원기지 출항
군사분계선 남쪽 50마일
국군함정 탐지파 포착
9.15 20:00 강릉 도착. 정찰조 침투
9.17 21:00 정찰조 복귀작전중 좌초
9.17 23:50 함정기물 파손후 도주
□침투 무장공비
해상처장 김동원(대좌·피살)
부처장 신영길(상좌·피살)
정찰조장 미상(사살)
정찰조원 미상(도주)
미상(도주)
함장 정용구(중좌·사살)
부함장 유림(소좌·사살)
기관장 안일춘(중좌·사살)
통신장 원홍철(대위·사살)
부기관장 박태훈(대위·사살)
항해장 이용호(대위·피살)
승조원 김승호(대위·피살)
및 김윤호(대위·피살)
전투원 이광수(상위·생포)
송동철(상위·피살)
함민선(상위·사살)
김창복(상위·사살)
김동현(중위·피살)
양봉선(중위·사살)
변의장(소위·피살)
김철진(소위·피살)
이철진(소위·도주)
이영철(소위·피살)
박정관(소위·피살)
김영일(상위·사살)
□무장공비 소탕작전
①9.18일 잠수함 발견
②9.18일 사체 11구 발견
③9.18일 이광수 생포
④9.19일 3명 사살
⑤9.19일 3명 사살
⑥9.19일 1명 사살
⑦9.22일 1명 사살
⑧9.22일 1명 사살
⑨9.28일 1명 사살
⑩9.30일 1명 사살
⑪10.9일 민간인 3명 피살<이동국 기자>이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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