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가을 6·29선언에 의해 시작된 여야의 개헌협상에서 최대의 쟁점은 직선대통령의 임기였다. 여당인 민정당은 6년 단임안을, 야당인 민주당은 4년에 1차 중임안을 제시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5년 단임으로 기울어져 갔다.이때 필자는 모시사지에 5년 단임안에 반대하는 글을 실었다. 단임제는 장기집권을 막고 권력의 순환을 쉽게 하는 장점이 있으나 멕시코(6년) 베네수엘라(5년) 등에서 드러났듯이 부패와 함께 통치권자의 과욕으로 5년마다 교각살우식의 「실험」을 되풀이하는 등 부작용이 많았음을 지적했다.
『5년 단임제의 경우 두가지 통치유형을 예상할 수 있다. A타입은 임기 1년은 국정 전반을 파악하고 2∼3년은 선거공약을 이행하며 4년째는 마무리하고 5년째 한해는 후계자(대권후보) 선정으로 보내게 된다. B타입은 집권초부터 1∼2년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3∼4년은 공약이행과 정돈을, 5년째는 후계자 고르기와 선거준비에 몰두한다. 이 경우 국정의 모든 부문을 개혁하려다 자칫 모순과 혼란을 자초할 여지가 많다. 성공적인 5년 단임의 요체는 치밀한 개혁설계준비와 국민설득이다. 이 모든 것도 내외정세가 급변할 때는 엄청난 차질을 빚게 된다. 따라서 제헌헌법처럼 4년중임제가 타당하다. 만일 서구수준의 공명선거를 할 수 있다면 8∼10년 단임제도 무방할 것이다』
이 글이 실린 뒤 필자는 「독재를 막으려는 데 왜 재를 뿌리는가」 「가만두지 않겠다」 「무슨 흑심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등의 잇단 협박전화로 한동안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당시 야당수뇌가 5년단임안을 쉽게 수용한 것은 겉으로는 여당의 완강한 주장 때문이라고 하나 실은 새 정부는 민주정부를 준비하는 과도적 성격이 될 것이라는 점과 거론되는 후보들이 돌려가면서 할 수 있다는 순환기대 때문이었다.
5년단임제는 6공을 거쳐 9년째 접어든다. 요즘 내각제니 4년중임제니 하며 속셈이 깔린 개헌론이 분분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중 절대 개헌불가」를 누차 천명한만큼 특별한 상황변동이 없는한 단임제는 상당기간 지속할 게 틀림없다. 국민이 선택한 우리의 숙명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대통령은 B타입의 통치를 한 셈이다. 한국병 치유를 통한 신한국건설을 내세운 김대통령은 지난 3년8개월동안 많은 일을 했다. 한국병의 큰원인은 군사정권의 정통성 결여, 권력형 부정부패, 그리고 지도층의 법과 질서 안지키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집권직후 재산공개, 군사조직 해체와 부정수술, 각종 비리 척결, 금융실명제, 정부기구 개편, 신경제정책 등의 단행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은 퇴색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재로 인한 대형사고의 연발, 잦은 고위직 인사, 관의 변함없는 무사안일과 복지부동, 정치개혁의 실패와 신경제정책의 실종도 그렇고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했음에도 여전한 중소기업의 부도와 선진국의 십수배나 되는 각종 규제, 그리고 되살아난 큰 정부등은 시행착오라 할 수 있다. 또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영국식 선거제도를 도입하고도 혼탁했던 금품살포를 과거처럼 적당히 마무리하는 선거사범처리, 오락가락하는 대북정책 등은 국민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줬던 것이다.
요즘 안보불안과 경기침체, 물가앙등으로 시달리는 국민들은 이양호 전 국방장관사건으로 참담한 심경에 빠져있다. 어떻게 군장성때부터 장관재임 때까지 3유건달브로커에게 인사청탁을 하고 군사비밀을 메모로 써주고 뇌물을 받는 뒷거래를 태연히 해올 수 있는가. 결국 한국병은 치유되지 않은 채 여전히 정부안에, 지도층안에 엄존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대통령이 정경유착의 단절을 선언하고 칼국수를 먹으며 개혁에 몰두하는 동안 국방의 최고책임자는 반개혁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공약으로 내세웠던 살맛나는 사회, 신바람나는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신한국은 요원한 것인가. 국민들은 감동도 감흥도 잊은지 오래다.
사실 김대통령은 취임이후 중요한 국정개혁은 거의 시도했고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따라서 국민들은 남은 임기동안 새로운 개혁, 획기적인 조치, 중대 결정을 발표하지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보다 지금까지 제기하고 추진해온 개혁과제들을 정리하는데 역점을 두기를 바라고 있다. 개혁 과제들이 완결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튼튼한 개혁과 쇄신의 기초를 닦는다는 의미 역시 막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의욕적으로 일했던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대통령이 「길지도 짧지도 않으며 국정 수행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한 현행 5년단임제의 정신을 구현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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