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민주화 횃불에 “세계의 격려”/93년 미 재단 사하로프상 이어 또한번 영광북경(베이징)에서 150㎞ 떨어진 남보(난바오) 강제수용소. 24일은 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국의 「양심」이 외부세계와 결코 단절돼 있지 않다는 희망을 확인해준 날이었다.
중국의 반체제 양심수 위경생(웨이징성·47). 그는 이날 유럽연합(EU)이 수여하는 96년 사하로프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93년 3월에도 미글라이츠만 재단이 제정한 동명의 상을 수상했던 그는 「사하로프」상만 두번째 받게됐다.
49년 북경에서 태어난 위는 원래 골수 모택동(마오쩌둥)주의자였다. 문화혁명의 광풍이 몰아치자 홍위병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군복무뒤 73년부터 북경 동물원 전기기사로 일하면서 자생적 사상가로 변신한다. 민주주의를 통한 중국 현대화를 주창한 것이다.
공산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78년 그는 마침내 10여년간 독학으로 체계화한 민주화론을 대중에 설파하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이 만들던 잡지 「탐색」에 「제5의 현대화」를 주장하는 글을 썼다. 농업 산업 과학기술 국방 등 등소평(덩샤오핑)의 4대 현대화 노선외에 민주화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지의 이 글은 곧 그 유명한 「민주의 벽」에 대자보로 나붙었다. 이른바 「북경의 봄」에서 일약 민주화 운동의 기수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등과 공산체제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위는 결국 79년 반혁명 및 국가기밀 누설혐의로 투옥됐다. 이후 14년 6개월간 독방 수감생활을 거친뒤 93년 만기출소를 4개월 앞두고 가석방됐다. 그러나 그의 투지는 가석방 이후에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중국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해외 언론을 통해 알리면서 민주화 운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대중적으로 이끌기위해 진력했다. 94년에는 방중한 존 새툭미국무부 인권담당 차관을 만나 중국인권개선을 위해 대중 최혜국(MFN)대우의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당국이 가만 둘 리 만무했다. 지난해 11월21일 반혁명 혐의로 다시 체포된 위는 결국 징역 14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영어의 신세가 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중국 민주화의 「등대」로 평가받고있다. 그가 주도한 「민주의 벽」사건은 이후 86년 상해(상하이) 및 북경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이어 89년 천안문 사태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사하로프」라는 이름의 상을 두차례나 받는 위이지만 언젠가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인권상이 제정될 날을 맞을지도 모른다.<이상원 기자>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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