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지도 미소작전 힘들었어요”/솔직히 우승까지는 예상못해/전력 약해지니 ‘터부’도 많아져/은퇴후엔 꿈나무 길러 봤으면정상은 오르기보다 지키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응룡(55) 해태 타이거즈 감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 것 같다.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 프로야구 출범후 15년동안 절반이 넘는 8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안고 야구 외길을 걸어 온 김감독. 그 아픔때문에 가족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강하면서도 14년간 또 야구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아온 그이다. 키 185㎝, 몸무게 100㎏(그는 자신의 정확한 체중을 밝히지 않는다)이 넘는 거구에 말 수가 적어 좀처럼 말을 붙일 수 없지만 일단 사석에서 만나면 더없이 소탈한 성격으로 친근감을 갖게 하는 흡인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꼴찌후보라는 주위의 혹평을 비웃으며 해태를 올해 또 한국시리즈 챔피언으로 만든 프로야구의 거인 김응룡 감독을 만나 그의 야구인생과 뒷얘기를 들어봤다.
□대담=유석근 체육부장
―다른 팀들은 한번도 하기 힘든 우승을 여덟차례나 했는데 비책이라도 있습니까.
『원론적이기는 하지만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고 우리팀에 운도 상당히 따랐다고 봅니다. 어느 지도자든 이기는 방법을 알면 좋겠지만 야구는 상대적인 운동이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죠』
―시즌 개막 전에는 해태를 꼴찌팀으로 꼽는 예상이 많았는데.
『당연한 예상이었습니다. 팀의 기둥인 선동렬이 일본으로 건너가 전력누수가 많은데다가 박재홍을 스카우트하지 못하는 등 신인보강도 제대로 안됐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타격이 강한 팀컬러가 되살아날 조짐도 없었죠. 저도 솔직히 우승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내년시즌을 바라보면서 젊은 선수위주로 팀을 이끌려고 계획했고 실제로 초반에 그렇게 했습니다』
―시즌 개막전 하와이 전지훈련에서 선수가 코치에게 대드는 항명사건이 일어나는등 팀 분위기가 전같지 않다는 말이 많았는데.
『시각에 따라 다릅니다. 문제될 게 없었는데 밖에서 자꾸 말들을 하는 바람에 일이 더욱 꼬였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타지에서 훈련하다 보면 선수들이 술 생각이 날 때도 있고 조금 탈선하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감독으로서 선수들의 자세가 해이해 지지 않도록 코치들에게 정신무장을 지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마찰이 생겨 선수들이 훈련을 보이콧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수들이 잘못을 모두 인정해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습니다』
―올시즌 들어 유난히 부드러워졌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같은 변신이 전지훈련때의 불미스런 일과 연관이 있습니까.
『주위에서 옛날처럼 무조건 강하게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충고를 많이 해줬습니다. 평생을 내 식대로 팀을 이끌었는데 하루아침에 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미소작전을 펴는 것도 선수지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보고 기회가 주어지면 선수, 코치들과 자주 대화를 가졌습니다. 또 코치들에게 재량권을 대폭 부여하겠다는 생각에서 되도록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변신을 두고 김감독이 많이 약해졌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창때 같은 용기는 없죠. 옛날에는 무서울 것 없이 작전도 펴고 선수들을 독려했는데 이제는 좀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야구감독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사인을 내고 작전을 펴야 하는 직업입니다. 성공반 실패반 확률의 상황에서 용기가 없으면 과감한 작전을 구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과감성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도 현대 김재박 감독이 내 작전을 간파한 경우가 더 많았죠. 더 솔직히 말하면 내년에는 더 약해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올해 한국시리즈서도 우승인사때 입을 양복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김감독은 한국시리즈를 8번이나 우승하면서도 최근에는 거의 양복을 준비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하면 꼭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올해도 경기가 끝난후 24일 광주에 가서 갖고 왔습니다. 사실 우리팀이 한창 강할때는 터부같은 게 없었죠. 하지만 팀이 약해지니까 별의별 일에 다 신경이 곤두섭니다. 아침에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탈때마다 안에 여자가 있는지 여부부터 살핍니다.(김감독은 93년 한국시리즈서 삼성과 7차전까지 가 어렵게 이기자 길게 자란 손톱부터 잘랐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손톱을 깎지 못했었다는 것)』
―해태에서 벌써 14년인데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어서 장수하는 것입니까.
『프로야구 출범때는 미국에 야구유학중이었습니다.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국가대표 4번타자와 감독을 지낸 저에게 감독직을 제의하는 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해 프로야구 원년의 개막전도 몰래 귀국해서 봤습니다. 그해 가을 귀국하니까 해태의 정기주씨(현 그룹기조실 사장)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박건배 구단주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마운 마음에 두번 생각할 것 없이 받아 들였죠. 당시의 고마움때문에 스스로 해태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해 주시죠.
『모두 7형제(2남5녀)였는데 1·4후퇴때 저와 아버지,누나만 내려왔습니다. 나머지 식구들은 생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피란오기전에는 축구선수를 했는데 부산 개성중 1학년때 반대항 야구대회에서 투수를 한 것이 계기가 돼 본격적으로 야구선수가 됐죠』
―현재의 가족들은.
『해태감독을 맡은 후 1년에 집에 들어가는 기간이 2개월 정도밖에 안돼 항상 아내와 두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애들이 모두 미국 유학중이라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큰 딸 혜성(23)은 미술을,작은 딸 인성(21)은 음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집사람도 애들 뒷바라지를 위해 아예 미국에 가 있죠』
―14년간 재산도 꽤 모았겠죠.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연봉 8,000만원이면 큰 돈이지만 세금을 제하고 손에 쥐는 월급은 520만원 정도입니다. 애들 학비가 꽤 들어가고 전남 화순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또 나는 광주에서 생활하고 서울의 처가도 돌봐야 하는 형편이라 네 집 살림을 하는 셈이지요. 생활이 빠듯합니다. 최근에는 송광사 부근에 갖고 있던 땅도 팔았습니다』
―중·고교에서 지도자를 하겠다는 은퇴후의 계획은 변함이 없습니까.
『최근에도 틈만 나면 전남의 고교팀들을 찾아보곤 합니다. 순천에 있는 효천고에 자주 가죠. 그런 행운이 올지 안올지 모르지만 꼭 한번 어린 선수들을 가르쳐 보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약력
△41년 평남 평원 출생
△부산상고(60년) 우석대(65년) 졸업
△한일은행 선수 및 감독(64∼81년)
△국가대표감독(77∼80년)
△주요 서훈 및 수상경력=국민훈장 석류장, 체육훈장 백마장, 83, 86, 87, 88, 89, 91, 93, 96년 프로야구 최우수 감독<정리=정연석 기자>정리=정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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