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조같지않은 취조 불구 배후언급만 하면 제지백범을 시해한 직후 헌병사령부로 압송됐으나 그 날 밤 바로 특무대로 옮겨졌다. 특무대에 도착해 1시간 넘게 의료진의 자상한 치료를 받았다. 27일 아침 김창룡 부대장(안이 군법회의에 회부되기 직전 특무대장으로 승진)이 자기방으로 나를 불러 커피와 담배를 대접했다. 그는 『안소위의 거사를 그야말로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바이오. 사적으로 말하면 정말 큰 거사를 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큰 일을 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은 부하에게도 『안소위님 방에 담배도, 신문도 넣어 드려라. 술도 사오라면 사오고 심부름을 잘 하라』고 지시했다.
취조를 받는 기간에 머물렀던 숙직실은 호텔이라고 말하면 어폐가 있겠지만 입을 딱 벌리고 놀랄 수 밖에 없는 시설이었다. 식사도 그야말로 풍성한 반찬과 고급스런 부식이었다. 신문도 실컷 보고 저녁에는 목욕도 했다. 취조기간 계속해서 이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심사숙고 끝에 내가 내린 해답은 「김지웅이 뒤에는 큰 배후가 있다」였다.
취조를 맡은 노엽 중령과 이진용 중위도 『하기 싫은 말은 안해도 되니 자연스럽게 합시다』라며 친절히 대해 주었다. 취조 중에도 처, 여동생 등 친척은 물론 내가 근무하던 포병사령부 장교들이 계속 면회를 왔다. 백범장례식(49년 7월5일)이 끝난 뒤에는 김지웅이가 면회를 와 돈까지 주고 갔다. 말이 취조지 자고 먹고 목욕하고 치료받고 면회받고 하느라 취조받은 것은 별로 없었다. 국부를 시해한 살인범인데 이런 비정상적인 취조가 없었다.
취조관들은 김지웅 장은산 홍종만(조사위:백범암살 실무집행자)과 결부된 얘기만 나오면 『그만하고 다른 얘기를 합시다』라며 극력 기피했다. 취조가 시작된지 10여일이 지난 뒤부터 내가 『장은산이를 종범신문은 커녕 증인신문도 안하는 이유가 뭐냐』고 항의하는 등 이들의 이름을 자주 들먹이는 바람에 승강이가 잦아졌다.
이러다가 재판을 받았다(8월3∼6일의 재판에서 안은 「피고를 애국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변론을 받으며 종신형을 받음). 취조를 받던 중 내가 『김지웅이나 장은산등이 내게 김구 선생을 제거하라고 강요할 때면 이들 뒤에도 명령자가 있는 게 뻔하다』며 『명령자가 누구인지 잘 모르나 이승만 본인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승만 아래에 있는 소위 과잉충성하는 막료들 장관들 장군들이 아닌가』라는 얘기도 했다. 이 때 취조관들이 『막연한 그런 말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라며 내 얘기를 적지 않으려 했다. 피의자 진술조서를 한 번도 보지 못해 이런 내용을 적었는지 안 적었는지는 모르겠다.
육군형무소에서의 생활중 김창룡이 찾아왔다. 김은 『안소위님은 장교식당을 이용하시고, 같은 고향출신인 경호병을 배치했습니다』라며 『면회는 물론 6만여 평의 형무소 내에서 마음대로 출입하도록 했으니 그렇게 아시오』라고 말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 집으로는 김창룡과 서북청년회원들이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다(조사위:안은 김창룡의 배려로 헌병들의 깍듯한 경례를 받는 등 호화판 감옥생활을 하다 6·25 발발 이틀 뒤인 27일 「15년 형 이상의 죄수는 총살하라」는 헌병사령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어 소위로 군에 복귀했다. 안은 배후에 김지웅 이상의 선이 있다고 분명히 짐작했으나 그 상부의 동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지위에 있었다. 특히 최대의 쟁점인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는 안이 92년 9월 『49년 6월20일께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나 「높은 사람이 시키는대로 일 잘하라」는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가 이를 부인하는등 분명하지 않다. 진상 규명은 안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하다).<이동국·김정곤 기자>이동국·김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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