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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하는 재벌정책(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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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하는 재벌정책(사설)

입력
1996.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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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기업경영을 위해 도입하겠다고 공언했던 신재벌정책이 껍데기만 남게 됐다. 지난 22일 당·정협의회에서 공정거래법개정안이 대폭 수정,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하려던 신재벌정책이 사실상 백지화한 것이다.정부의 재벌정책이 왜 이렇게 손쉽게 표변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당·정은 뚜렷하고 논리정연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단순히 경쟁력강화가 최대 현안인 현시점에서 재벌그룹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다. 그러나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정부는 과연 앞으로 경제정책을 특히 재벌정책을 어떻게 끌어갈지를 분명히 해줘야 한다.

우리나라 재벌그룹들의 경제력 집중은 경제의 안정성을 해칠 정도로 위험수위에 있다. 종종 재벌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는 이미 사실상 30대 재벌그룹, 좀 더 좁히면 5대 재벌의 독과점체제아래 좌우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경제의 영향력이 가장 크고 보면 우리나라 자체가 재벌그룹의 그늘아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국가와 사회의 안정과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어느 특정 이익집단의 힘의 집중은 득보다 손실이 크다.

따라서 재벌그룹들의 경제력 집중은 이제는 억제돼야 한다. 정부가 신재벌정책을 방기한 것은 역시 단기적인 눈앞의 방편을 위해 장기적인 정책의 비전을 내버리는 것이다. 재벌그룹의 문어발식경영억제와 거래의 공정질서 정착이 우리나라 경제질서 확립을 위한 기본구도라면 그 구도를 크게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번 공정거래개정안의 핵심항목은 계열사채무보증한도 철폐와 친족독립경영 회사도입인데 이 항목들을 폐지한 것은 종래의 재벌정책까지도 흔들어 놓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재벌의 경제력집중억제라는 전통적인 재벌정책에 배치되는 것이다. 계열사의 채무보증한도는 현행 2백%인 것을 98년 1백%, 2001년 0%로 축소한다는 것이 당초의 계획인데 이번에 98년 1백%로의 축소까지는 이행하되 2001년에 없애기로 한 것은 폐기키로 했는데 5년뒤의 계획을 서둘러 폐기한 이유가 뭣인지 모르겠다.

분리된 계열그룹과의 내부거래를 감시하기 위해 도입코자 했던 친족독립경영회사는 아예 개념을 백지화하기로 한 것도 과잉반응이라 하겠다.

그룹계열기업간의 거래를 투명하게 하기 위한 연결재무제표의 도입을 취소키로 한 것도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경제·사회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미 선진국에서 모두 실시되고 있고 시장개방이 확대되면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제도를 기피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그것이 경쟁력강화의 이름으로 이뤄진 것은 더욱 그렇다. 공정거래법개정안의 후퇴는 철회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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