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시해된 것은 8·15광복이후 지난 51년간 최대의 정치적 테러사건이었다. 온 국민이 이 사건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던 것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암살의 정확한 목적과 배후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괴한 것은 범인은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데도 배후조종 세력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온 것이다. 이제 비밀의 열쇠를 쥔 범인 안이 피살됨으로써 범행의 전모가 영원한 미궁으로 빠지게 된 것은 실로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이른바 해방정국기간에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씨 등이 암살됐지만 국민들이 백범암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무엇보다 백범의 관록과 무게, 그리고 당시 정치적인 위상과 영향력때문이다. 실천적인 항일투쟁노선으로 주석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8·15로 환국후에는 단선단정을 반대, 완전한 자주통일을 내세우며 북과의 정치협상을 주장하는 등 이승만 박사와 라이벌관계를 이룬 대표적 지도자였던 것이다. 결국 안두희가 민족주의의 큰 혼과 큰 맥에 비수를 꽂았을 때 겨레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건후 당국의 석연치 않은 수사활동도 그렇고 범인이 15년 징역형을 받았다가 6·25로 감형·사면되고 1년후 제대, 군납업을 하는 등 당국의 각별한 비호는 깊은 의혹을 샀다. 불의가 횡행케함으로써 사회정의와 역사를 왜곡시킨 것이다.
4·19후 백범암살의 의혹규명론이 제기됐으나 5·16으로 중단됐다. 력대정부가 진상규명에 미온적이거나 외면해 온 것은 직무유기가 분명하다. 공소시효에 관계없이 정부차원에서 진상, 즉 배후관계를 낱낱이 밝혀 국민의 의혹을 풀어주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어야 했다.
안두희는 「범행 1주일전 신성모 채병덕 등과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포병연대장 장은산 중령이 사주했다」 「장모 등 경찰간부들의 암시를 받았다」 「김창룡 특무대장이 지시했다」는 등의 진술을 했다가는 「우발적인 단독범행」이라고 번복하여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94년 1월 14대 국회 법사위 소위에 들것에 누운채 출두했지만 그는 끝내 진실을 털어놓지 않음으로써 국민을 배신했다.
어떻든 그는 범행후 한때 특정세력의 반짝비호를 받았으나 평생 머리를 짓누르는 죄악의 쇠사슬에 얽힌채 추격과 테러공포 속에 지낸 것은 당연한 업보다.
이제 백범 사건의 진상은 역사속에 묻히게 됐다. 역사는 말은 없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교훈은 백범살해 사건 같은 반민족적행위는 두번다시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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