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산 사령관 “백범 죽여라” 명령/경교장 도착 “명배우 돼야겠다” 다짐23일 피살된 안두희씨는 60분짜리 테이프 1백20개 분량의 증언을 남겼다. 14대국회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규명조사위」(위원장 강신옥 전 의원)는 94년1월 안씨를 불러 조사하려 했으나 안씨가 실어증상태여서 92년 백범정신선양회 회장 김석용씨의 권유로 녹음한 증언을 95년 12월 2권분량의 녹취록으로 발간했다. 조사위는 당시 이 증언이 『백범암살의 진상을 밝히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자 가장 진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 증언」중 백범암살 전후에 관한 부분을 나누어 싣는다.<편집자 주>편집자>
나는 47년 신의주에서 월남한뒤 서북청년단에 가입했고 이를 인연으로 포병소위로 입대했다. 이후 장은산 포병사령관과 김지웅(홍종만과 함께 백범암살의 핵심실무자)등을 만났다. 두 사람은 『빨갱이들을 때려잡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김효익 경감에게 총격을 가한 놈들이 한독당의 프락치들이다. 이들이 경교장(백범기거지)에 있다. 그 곳에 자주 출입하면서 김구도 가까이하고 조직을 파헤치라』는 첫 밀명을 주었다. 두 사람이 나를 신뢰하는구나 싶어 뿌듯했다. 그 이후 일요일에 경교장으로 가 김구선생을 만났다. 김구 선생은 『포병장교로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했고 이후 4∼6차례 계속 찾아간 뒤에는 권총을 지닌채 혼자서도 만날 수 있었다(조사위:김지웅 등이 안두희의 한국독립당 가입을 주선한뒤 백범암살의 당위성을 세뇌시켰고 49년 6월 세 번에 걸쳐 암살을 시도, 세번째 성공했다). 49년 6월24일 장사령관이 김지웅과 홍종만, 그리고 나에게 『김구 선생이 26일 공주의 한독당산하 건국실천양성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부하들과 차를 타고 가니 병점고개(수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모조리 쏴죽여라』고 해 『맡은 바 임무를 깨끗이 수행하고 돌아와 보고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홍종만 등과 부하 20명을 데리고 지프차를 타고 병점고개에 대기했다가 돌아왔다(공주경찰서장이 행사개최를 불허해 김구 선생은 현장에 가지 않음). 장사령관(진상조사위: 장은 당시 김구 선생 암살지휘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이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마지막 주사위밖에 없다. 안소위가 그 전처럼 일요일에 (경교장으로) 놀러간 것처럼 찾아가 공주에 왜 안 갔는가 물어보고 김구 선생이 있으면 (2층으로) 올라가 얘기하다가 그럴 계제가 되고 타임이 되면 (살해)하라. 우리는 너보다는 나중에 죽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너밖에 할 사람이 지금은 없다. 우리가 결의는 안했지만 이것(김구 암살) 할라고 약속을 했던 것. 아무리 봐도 홍종만이보다 안소위가 연배도 아래고 하니 네가…해라』. 이렇게 쌀쌀한 응대로 쌀쌀한 명령을 받았다.
장이 『네 수단껏 하면 너는 죽지 않게…』라고 하기에 안하겠다고도 (말)못할 것같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하겠시다. 내일 아침에 내가…』라고 얘기했다. 장이 남의사(암살 등을 주임무로 하던 중국 국민당의 비밀조직)의 사칙과 행동관례를 언급하면서 『잘못되든가 안되든가 하면 너도 갈 수 있다』고 반공갈한뒤 난데없이 포옹을 하더라. 집으로 돌아가 낙상해 다친 처와 밤새도록 부둥켜 안고 울다가 26일 아침 10시께 집을 나와 시청앞에서 지프차를 탔다. 경교장 앞 자연장다방에 들렀는데 11시가 넘으면서 웬 헌병들과 사복형사같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앉아 있는 나를 유심히 주시했다. 다방을 나와 경교장을 태연자약하게 들어갔더니 순경이 검문도 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현관에 도착한뒤 마음속으로 「명배우」가 돼야겠다고 부르짖으며 현관문을 열었다.<이동국·김정곤 기자>이동국·김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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