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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파괴(공연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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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파괴(공연읽기)

입력
1996.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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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 전 이야기이다. 외국의 어느 이름난 작곡가가 우리나라에 와서 자기의 작품세계에 대해 강연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 속에서 한 사람이 이런 요청을 했다. 『당신의 음악을 들어보면 아무래도 「…주의」인 것 같다. 왜 그런 주의를 택했는지 말해달라』 그러자 그 작곡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답변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작품경향에 대해 말했다. 충분치않다면 나의 작품 자체가 설명해줄 것이다. 작가로서 나는 구체적인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며 내 자신 어느 「주의」인가에는 관심도 설명할 책임도 없다. 실은 내가 「…주의」라는 말도 오늘 처음 들었다.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이다』실체보다는 명분을 몹시 따지는 과거의 관습 때문일까. 요즈음은 덜해지긴 했지만 작가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보다는 어느 소재로 만들어졌는가에 지나치게 가치를 주는 경향이 있고, 개개의 사례보다는 개념에 대한 왈가왈부가 늘상 벌어지고 있다.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성이냐, 상업성이냐?」「페미니즘이냐, 아니냐?」 「예술이냐, 외설이냐?」. 이런 논란은 그래도 작품에 관한 것이지만 더 추상적인 개념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수도 많다. 그중 하나가 장르파괴라는 것이다.

공연에서 장르파괴란 관객의 취향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으로 파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액체를 파괴할 수 있는가?) 더구나 장르파괴라는 것은 비슷비슷한 것을 모아 집어넣는 서랍과 같은 것이라서 나중에 정리하는 사람(이를테면 역사가)들이 신경쓸 일이지 연주의 가치가 장르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클래식 가수가 팝송을 불렀다고 해서 어느 쪽에서 감격해할 필요도 없고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신기한 것은 파괴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성악가와 가수를 구별하는 관행이다.) 객석의 관심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부른 사람이 얼마나 잘 불렀는가이고 그 사람을 아끼는 팬이라면 『저 사람이 창법을 달리 해 부를 때 앞으로의 노래에 지장이 없을까?』 하는 염려 정도이다. 음식문화에 비유해 말한다면 생선 회를 먹고 싶은 사람은 맛있게 하는 일식집을 찾아가는 법이지, 중국집에 찾아가 메뉴에 없다고 화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조성진 예술의 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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