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건국대 교수 중국 현지조사서 기록 입수/민족진영 무장투쟁 「한민군」 결성도 밝혀져/신채호 사사… 3·1운동때 시위주도 하기도만주를 중심으로 광복전까지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 「한민군」의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박영석 건국대 교수(64·사학)는 최근 중국 현지조사를 통해 「한민군」과 총사령 신산(본명 신동준·1893∼1968)의 기록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박교수는 중국 길림(지린)성 훈춘시에 거주하는 신 산의 외아들 창환씨(62·전 중학교 수학교사)에게서 아버지가 생전에 구술한 내용을 기록한 「한민군 회고록」을 입수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강원 금강산 부근 평산 신씨 가문에서 태어난 신 산은 23년 5월 만주 하얼빈에서 이영남 박충식 김천일 최주국 이홍수 임호 김성만 등과 한민군을 조직, 43년까지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국민부 소속 「조선혁명군」(사령관 양세봉)이 1934년 와해 된 이후 민족진영 독립군이 만주에서 활동한 사례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36년께 병력이 800여명이던 한민군은 중국 소련군과도 여러 차례 연합작전을 펼쳤는데 1938년 7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과 소련군이 대규모 무력충돌을 한 「장고봉 사건」에서도 소련군을 지원,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독립운동사에 처음 등장하는 신 산의 파란만장한 삶도 주목된다. 회고록에 따르면 단재 신채호를 사사한 그는 1913∼15년 2년간 도쿄(동경)유학을 다녀온 뒤 서울에서 「독립촉성회」결성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한민보」를 발행하는등 청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919년 3월1일에는 33인중 한명인 최린의 요청으로 탑골공원의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회고록은 또 그가 김성수 등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작업에도 간여했으며 초창기에 기자로 활동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그가 사용한 가명은 현재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20년 9월 동아일보 1차 정간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망명한 그는 독립촉성회 시절의 옛동지들과 함께 한민군을 결성했다. 한민군 총사령자격으로 상해(상하이)임시정부와도 지속적인 교류를 했으며 1928∼29년에는 임정의 「군참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민군의 노선문제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잠시 환국했다가 42년 함경도에서 일경에 체포돼 투옥됐다. 척추손상으로 43년 가석방된 뒤 반신불수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고 공산화한 중국땅에서 숨어 살다 7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신 산과 한민군에 대한 논문을 준비중인 박교수는 『회고록에 등장하는 한민군 자금모집책 신영균씨(67년 작고)의 후손을 최근 의정부에서 찾아냈다』며 『많은 실증자료를 확보한 뒤 이 내용을 학계에 보고하겠다』고 밝혔다.<변형섭 기자>변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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