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일이다. P제철소가 위치한 해안도시에 수백억원이 한꺼번에 풀렸다는 정보가 나돌았다. 200명 정도의 명예퇴직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이었는데, 현금의 행방을 쫓는 시중은행이 그냥 넘길리 만무했다. 은행은 곧 베테랑급 영업사원을 이 도시로 급파했다. 며칠 전 국감을 통해 알려진 문예진흥원의 퇴직금 규모는 「팔자고치기」에 충분한 정도여서 세인의 부러움을 샀다.30년 근속에 퇴직금이 14억원이라니 퇴직과 동시에 갑부가 되는 셈이다. 두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우선, 한국의 기업은 일시에 수백억원을 지급할 만한 지불능력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와, 목돈 형태로 지급된 일시불은 과연 퇴직금 원래의 취지에 적합한가의 문제이다. 나도 사실 「월급쟁이」이므로 엄청난 목돈을 일시에 받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기업의 후생복지
그런데 퇴직금을 일시불로 지급하는 제도는 선진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은 노후 생활보장의 공적책무를 개인으로 이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국민경제의 활성화와 기업경쟁력 제고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퇴직금은 후불 임금의 일종이면서 평생의 헌신에 보답하는 사회적 보상이자 노후 생활안정을 위한 보장기제이다. 그런데 일시불 퇴직금제도는 이러한 원래의 취지를 훨씬 넘어 자원낭비를 초래하고 심지어는 투기풍조를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고를 요한다.
우선 목돈은 쓸데없는 갈등을 초래한다. 평화롭던 집안이 부모의 퇴직금 용도를 두고 사분오열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부모 소유의 사회적 보상금을 자식들이 탐내야 할 합리적 근거는 없지만 노인부양의 궁극적 책임이 자식들에게 주어진 바에야 자식들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부모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 문제이다. 퇴직금이 기업체의 자금원인 주식시장으로 풀리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최근 우후죽순처럼 늘어 난 주유소와 식당의 투자자가 대부분 퇴직자일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면 우울해 진다. 돈 벌 수 있는 곳에 자금이 몰리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생산적인 용도로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퇴직금이 생산적이 되려면 억대가 넘는 목돈을 한꺼번에 주는 일시불 지급 제도를 전격 폐지하고 월급 형태의 연금제도로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국의 대기업이 시행하는 기업복지의 혜택은 가히 세계적이다. 앞에서 예시한 P제철을 위시하여 재벌그룹의 복지혜택은 세계 정상급이다. 이는 공공복지 비용을 최대한 아끼려는 정부 정책 탓이며 역으로 종업원들의 일상생활까지 떠맡아야 한다는 가부장제적 기업문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후생복지가 개선되는 추세에 근로자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후생복지에 쓰여지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R&D, 생산합리화, 교육훈련 등에 쓰여진다면 최근의 경제침체는 쉽사리 극복될 것이라는 점에서 제도 합리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복지 비용은 부가가치 생산액의 5%, 총노동비용의 18%를 점할 만큼 불어났다.
임금비용이 총노동비용의 40∼50%임에 비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규모이다. 기업의 후생복지 프로그램은 법정복지 15종, 비법정복지 45종을 포함하여 모두 60여종에 이른다. 특히 「비용증대전략」을 통해 노사안정을 모색해 왔던 87년 이후 기업의 복지 부담은 배가 되었다. 복지수혜의 크기도 기업의 지불능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좌우된다. 말하자면, 기업은 경영 상태와는 관계없이 기업의 위신에 걸맞은 혜택을 제공해야 할 처지이다.
○경쟁력 제고 난항
관리비용이 이렇게 급증하는 상황에서 기업경쟁력 제고는 난항에 부딪친다. 경기침체의 극복방안으로 추진되는 감량경영은 인적 자본의 경시풍조를 부채질할 위험도 있고 동시에 퇴직금의 일시지급을 요하기에 기업의 자금난을 가속화할 폐단도 있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경쟁력 10% 높이기」 방안은 여러모로 괜찮은 아이디어를 담고는 있지만, 60여종에 달하는 후생복지를 공공복지화 하여 기업부담을 경감시켜 주는 등의 보다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절실하다. 이런 관점에서 기업에 가장 큰 부담이 되는 퇴직금 제도를 과감하게 수정할 것이 요망된다. 첫째, 일시불 지급제도를 연금으로 전환하고 둘째 퇴직금 적립금을 연금기금화 하여 기업과 노동조합에게 필요에 따라 대여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일이다. 한국의 퇴직금 제도는 세계적 수준이다. 국공기업체와 대기업의 경우 20년 근속자는 평균 1억원 정도의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액수도 「세계적」이지만, 목돈으로 지급하는 점도 「세계적」이다. 감량경영은 경제불황의 타개책이지만 해고자와 명예퇴직자에게 주어야할 일시불 퇴직금의 부담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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