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보다 원형보존이 중요”/천마총·안압지·황룡사지·무령왕릉 등/반세기에 걸친 발굴현장 뒷얘기 담아『평생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하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을 졸속으로 마친 것이 평생의 멍에로 남아 있습니다』 30년 넘게 고고학연구의 외길을 걸으며 전국의 중요 발굴현장을 지켜본 조유전 국립민속박물관장(54)은 기회있을 때 마다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발굴도 필요하지만 문화재의 원형이 파괴 또는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학계에서 「타고난 발굴꾼」으로 꼽히는 조관장이 해방 이후 한국고고학의 여정을 되돌아본 「발굴이야기」(대원사간)를 냈다. 46년 우리 학계 단독으로 실시한 최초 발굴인 경주 신라 호우총부터 80년대 경기 연천군 전곡 구석기유적까지 반세기에 걸친 발굴성과와 뒷얘기를 담고 있다.
그가 참여한 최초의 발굴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현 고고미술사학과) 졸업반이었던 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발굴대상은 유적현장이 아니었다. 다만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고 김원용 박사의 지도 아래 경기 소사(현 부천시) 신앙촌 쓰레기매립장을 발굴현장으로 삼았다. 현대를 선사시대로 가정했을 때 후세 사람들이 쓰레기장을 발굴하고 어떤 결론에 도달할까 하는, 고고학 발굴 및 그 연구법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서였다. 이후 댐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놓인 많은 고분, 도굴꾼이 훑고 지나간 절터, 그리고 왕비의 어금니가 발견된 왕의 무덤과 찬란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낸 고분에 이르기까지 땅위에서, 땅속에서, 물속에서 강산이 바뀌는 긴 세월을 보냈다.
60년대말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감은사지 황룡사지 등 신라의 신비를 오늘에 전하고 있는 유적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이다. 텁수룩한 머리에 작업복 차림을 한 그의 짐 속에서 나온 카메라 나침반 지도때문에 간첩으로 오인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0시간 발굴의 졸속으로 끝난 무령왕릉, 안압지 출토 목선을 운반하다 부러뜨린 일, 참나무로 만든 주사위가 보존처리과정에서 한줌 재가 된 일, 사진기자들의 취재경쟁으로 청동숟가락이 부러진 일등 회한도 많았다.
발굴에 얽힌 일화도 재미있다. 70년 경주 안계리 신라고분에서 물이 가득찬 뚜껑없는 토기항아리가 발견됐다. 영험하다고 알려진 「천년수」가 나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부들이 서로 마시겠다고 야단이었다. 당시 현장책임자였던 조관장은 『내가 마셔보고 1시간 동안 별 이상이 없으면 그 때 마시게 하겠다』고 한 뒤 그 물을 먼저 마셨으나 아직까지 별탈이 안 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회고했다.
또 인부들이 출토된 신라토기에 끓여 놓은 뱀탕을 두 눈 딱 감고 마신 일도 털어놓았다.
조관장은 『땅속에 감춰진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는 발굴조사도 중요하지만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땅속에 묻혀 있는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여동은 기자>여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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