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빈 자리(천자춘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빈 자리(천자춘추)

입력
1996.10.07 00:00
0 0

농촌에 젊은이가 없다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인들의 지혜는 힘든 일을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에 근력을 모아 해야 할 일들도 있는 법이다. 우선 볏가마를 나르는 일이 그렇다. 벼를 널어 놓았다가 때아닌 소나기라도 만나는 날이면 꼼짝없이 물구덩이에서 볏가마를 건져 올리는 꼴이 되고 만다. 경운기에 딸린 농기구들은 힘이 달리는지라 접속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집 안을 둘러보아도 나을 게 없다.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자식들이 부모님을 위해 새 가전제품을 들인다는 소식이 이 집 저 집에서 들려온다. 동네 고샅에 마련된 쓰레기 집하장만 보면 누구네 집 어떤 가전제품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들여놓은 물건들이 말썽이다. 제대로 된 사용법을 모르다 보니 고장이 잦을 수 밖에 없다. 예전에 그런 고장수리는 모두 젊은이들의 몫이었다. 요즘엔 애프터 서비스라는 것이 잘 돼 있는데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골마을까지 텔레비전 채널 조정이나 퓨즈를 갈아끼워 주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노인들만 사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서비스 신청 후 며칠을 뜸 들인 끝에 나타나 디미는 출장비라는 청구서를 받아본 기억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가전제품 작동상태가 수상쩍다 싶으면 곧바로 나를 찾아온다. 내 수리솜씨가 대단해서는 물론 아니다. 시계 건전지를 교환해 주는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건전지와 벽에서 떼어낸 먼지투성이의 커다란 시계를 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퓨즈를 갈아끼워 드리고 텔레비전 채널을 조정해 드린다. 전화고장 신고를 대신해야 하고, 어떤 땐 정전은 생각지도 못한채 냉장고가 고장났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사용법이 조금 복잡한 가전제품들은 있으나마나 한 경우다. 진공청소기는 먼지봉투 교환방법을 몰라 처음 몇 번 사용한 상태로 처박히기 십상이다. 버튼을 꾹꾹 눌러 사용하는 오래된 전화기를 기능이 다양한 전화기로 바꿔드렸더니 결국은 사용법을 몰라 다시 예전 것으로 바꾸는 경우도 봤다. 편리라는 명목이 가져온 또 다른 폭력 앞에 노인들은 속수무책이다. 이렇듯 농촌의 가을은 안팎의 빈 자리로 예전의 풍요로움은 찾기 힘들어졌다.<박경철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