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약동하는 기의 집합체/이와 기는 서로 혼연일체” 역설/중 성리학과 다른 철학관 제시『10년동안 면벽수도한 지족선사는 나에게 하룻밤에 무너졌지만 화담선생은 내가 가까이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마음과 몸을 어지럽히지 않으셨다. 성인이시로다』
황진이는 자신의 유혹을 뿌리치고 진정한 사제의 정을 베푼 화담 서경덕에게 이같은 흠모의 말을 남겼다. 화담의 이런 고매함이 그를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인격자로서의 화담이 아닌 철학자로서의 화담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우주를 기로 이해했던 그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이다. 화담 기철학의 알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저서가 바로 「화담집」이다.
「화담집」은 화담이 직접 쓴 본집 2권과 후학들이 그를 기려 편찬한 부록 2권으로 꾸며져 있다. 이 책의 진수는 화담이 태허(우주)와 기의 연관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태허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쥐면 비어 있고 잡으면 없다. 이 태허에는 단 하나 기가 있을 뿐인데, 이 때문에 비어 있는 태허에 약동이 일어나고 개벽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기를 약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성질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우주가 곧 기이기 때문에 기가 비록 흩어졌다 모였다하기는 하지만 결코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역설한다. 물건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기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눈에 보이는 현상이지 결코 기 자체가 소멸하고 생성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에 대한 그의 관점은 주자학의 이선기후론(우주에 이가 근원이고 기는 이의 외연이라는 이론)을 정면으로 공박하는 것이다. 화담의 기철학을 바탕으로 율곡은 주기론을 피력한다. 그러나 실상 율곡의 주기론은 화담의 기철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화담은 이와 기를 나눠 한쪽에 비중을 두는 것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화담집」에 나타나는 이기일물론이 이와 기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 밖에 이란 없다. 이란 기의 주재이다. 기가 주재한다함은 밖에서 운동함이 아니라 기와 이가 서로 혼연일체함을 의미한다』
성리학자이되 본래의 중국 성리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화담의 독특한 철학세계는 평소 그의 소신대로 『성현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진리를 후학에 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화담집」이 청나라 건륭제가 필생의 사업으로 편찬한 「사고전서」안에 조선인의 개인저서로는 유일하게 실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독창성과 무관하지 않다.<이은호 기자>이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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