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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정구영 서울여대 총장(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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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정구영 서울여대 총장(한국논단)

입력
1996.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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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높다. 들녘에는 연천과 철원의 수해와 악몽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황금물결이 넘실거리고 있다. 고속도로변의 코스모스도 상쾌한 가을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며칠간의 연휴로 이어지는 이번 추석에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묻혀 있는 귀소본능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생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긴긴 민족대이동의 행렬은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고 휘영청 밝은 달은 여전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를 것이다.그러나 이번 추석은 예년의 추석과는 현저하게 다른 분위기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불경기로 인하여 추석 보너스봉투가 얇아져 주머니는 한층 가벼워지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휴가는 오히려 길어졌다고들 한다. 또 한 편에서는 추석보너스는 커녕 느닷없이 일자리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먼 산 불 보듯 할 수 있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우울해 하고 있다. 오죽하면 소위 「봉급쟁이의 3빼」라는 암울한 유행어까지 나돌까. 스트레스 때문에 부어 있는 것도 모르고 아내와 자식들이 살 빼라고 다그치는 것이 첫째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전셋값을 미처 감당하지 못하니 집주인이 앙칼지게 내뱉는 방빼라는 것이 둘째요, 불경기로 회사가 견디지 못하겠으니 책상 빼라는 것이 그 세번째라고 한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북한 잠수함이 제 집 드나들 듯 했는가 하면 영화에서나 보는 줄 알았던 총격전이 벌어지고, 해맑은 눈빛을 가진 철석같이 믿었던 장대같은 아들을 무장공비의 손에 빼앗기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속절없이 보고 있어야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참으로 우울한 추석연휴가 될 것같다.

○악조건속의 생존

미국 동부에서는 대구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많이 잡힌 대구를 각지로 보내야 하는데 편의상 냉동을 시켜 보냈더니 대구 특유의 풍미가 없어져 상품가치가 떨어졌다. 그 다음에는 대구를 산채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해서 바닷물이 들어 있는 큰 수조에 대구를 넣어 보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좋지 않았다.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드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어찌 된 셈인지 대구 특유의 향취도 떨어지고 육질도 연하고 흐물거리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사람이 제안한 창의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 때문에 대구를 방방곡곡으로 마치 갓 잡았을 때처럼 싱싱한 상태로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의 천적인 메기를 대구가 들어 있는 수조에 한 두마리만 같이 넣어주면 되는 지극히 간단한 방법이었다. 천적인 무서운 메기가 수조 안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동안 대구는 메기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서 부지런히 도망쳐야만 했고 바로 대구가 계속적으로 깨어서 움직임으로 인해 대구는 싱싱한 상태로 있게 된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안일이라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이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유례없는 고속도의 경제성장을 마음껏 자랑도 하고 즐기면서 그럭저럭 적당히 넘어가도 여기까지 왔으니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는가. 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섰으니 이 정도쯤은 누리고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만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남의 나라에 가서 호기있게 1,000만원쯤 하는 모피코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선뜻 사오는가 하면 이름있는 상표의 상품이라면 싹쓸이를 해와야 직성이 풀리는지 호화쇼핑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문제가 되어왔다. 술도 불란서제 고급 술이어야 하는지, 올 상반기에 한국의 프랑스산 주류 수입액이 총 150억원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물경 40%나 증가해서 한국의 수입증가율이 단연 세계 제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달콤한 환상 그만

또한 계속되는 수해로 쑥밭이 되어가고 있는 북한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쌀만 보내주면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과소평가하며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 살난 아이에게 물어보아도 뻔한 사실을 금번의 무장공비침투사건을 훈련 중에 일어난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이라며 오히려 생떼를 쓰는 북한의 현주소를 똑똑히 목도하면서 더 이상 신기루같은 달콤한 환상만을 좇을 때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경기침체, 북한의 무분별한 책동. 어느 것 하나 우습게 볼 만큼 만만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수조 속의 메기와 같이 대구의 생명을 노리는 악조건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늦었다고 할 때가 오히려 빠른 때이고 시작할 때라는 말처럼 오히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안일함, 호화사치, 안보불감증이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조이고 힘을 모을 수만 있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힘있게 다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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