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늦더위가 유난히 길어 9월 중순까지도 한여름 기온이었다. 그 쨍쨍한 일조량 덕분에 산야의 온갖 곡식과 실과가 잘 여물고 달게 익었다. 그러나 계절의 순환법칙은 돌릴 수 없어 추석절기에 이르자 아침 저녁 선들바람이 소매 깃 사이로 스며들고 하늘이 훨씬 높게 푸르러졌다. 어느 사이 청량한 가을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1,200만명의 대이동, 올해 추석연휴도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이룰 것이다. 경제불황으로 경기침체, 기업의 감량선풍으로 조기 명예퇴직제, 10%에 이를 듯한 체감 물가고에도 불구하고 고향의식이 남다른 세대는 자식을 데리고 조그만 선물이라도 꾸려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다. 경제개발이 시작되던 60년대초만 해도 농촌인구가 7할이었으나 이제는 도시인구가 8할을 넘어섰다. 농촌출신 세대가 생존하는 세월 동안은 명절 귀향의 의미가 뜻깊고 감회로울 수밖에 없다.
○깊어가는 주름살
나이 마흔 중턱을 넘어선 세대는 너나없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고향 추석절기에 대해 한 두 가지 추억쯤은 간직하고 있다. 햇곡과 새 과일로 먹거리 풍성했던 추석차례상, 메뚜기 잡던 황금 들녘, 토담 안의 감나무에 붉게 익은 감, 들국화와 억새 어우러진 성묘 산행길에 줍던 알밤…. 가난했을 망정 넉넉하던 이웃인심이 암암하게 떠올라 추석 귀향은 오가는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짜증도 나지만 마음 부풀기가 선머슴애같기 때문이다. 헤어진 가족과 친지를 오랜만에 만나면 보릿고개시절의 추억으로 한가윗달이 기울도록 이야기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농어촌도 이제 예전 농어촌이 아니다. 노인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송사리떼 노닐던 그 맑던 냇물은 생활하수로 오염되고 삼면바다는 적조현상으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는 현실이다. 수해를 입은 경기 북부지방을 제외하곤 올해 작황이 근년에 없는 풍년이다. 풍년이 들어도 주식용 수입쌀까지 들여온다니 농민들 주름살이 깊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섰고 선진국 진입이 초읽기라며 떵떵거리던 허장성세가 올해들어 수출을 주도하던 반도체 국제가격 추락에 덜미가 잡히자, 급하강 내리막 열차를 타고 말았다. 국제경쟁에서 다원화하지 못한 산업구조가 한 순간에 드러나고, 빚은 눈더미처럼 커져 자원없는 국가순위로 따지자면 한국이 단연 외채 1위국으로 올라섰다.
그래도 지난 여름은 해외로 피서 떠난 관광객이 김포공항 로비를 발디딜 틈없게 만들었다. 파리와 로마는 눈에 띄는 관광객이 한국인이었다니 얼추잡아 150만명 이상이 뼈빠지게 번 외화를 흥청망청 쓰며 싸돌아 다녔다. 국회의원은 병값만 1병에 100달러짜리 「루이 13세」라는 술에 모피코트를 들여오고, 대운동장에 비행기까지 띄우는 초호화 결혼식을 치르기도 했다.
한쪽 동포가 1인 1일 200g의 감자 옥수수 배급으로 기아선상을 헤매는데, 무조건 쓰고 보자는 망국풍조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뒤늦게 허리띠 졸라매자며 혜안을 모색해본들 둑 터진 봇물이다. 20억짜리 아파트까지 등장하는 마당이니 가진 자들의 반성없이 서민들만 졸라붙인들 소귀에 경읽기다.
이번 추석절기는 북한의 무장공비들까지 잠수함 타고 침투하여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하다. 언제 없어진 통금인데 강릉 일원에 야간통행 금지까지 선포되고 연일 총격전까지 벌어져 아군도 사상자가 생겼다.
이런 사태가 영화가 아닌 현실이란데 충격적이다. 중무장한 잠수함이 자기 집 안마당이듯 며칠씩 철통수비라는 우리 해안까지 오가며, 위장하여 상륙한 적군이 정찰활동을 했다 함은 군의 경계태세 태만만 나무랄 게 아니라 오늘의 우리 현실이 그만큼 방만하다는 한 단서에 불과하다.
○보름달에 염원을
도덕·윤리를 망각한 파행, 가치관없는 일회성의 생활관, 근검·절제를 모르는 방종, 비전없는 단견의 국가경영이 총체적으로 빚은 난국이다. 2차세계 대전직후 유럽선진국과 비견되었던 자원대국 브라질·아르헨티나가 오늘의 제3세계권으로 전락한 이유가 정치불안에서 시작하여 사회 전반의 기강이 급속도로 무너진데 그 원인이 있다. 그런 위기의식을 정치와 경제가 이제서야 깨닫는데 한총련 연대 점거사태와 무장공비 침투에서 보듯,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어수선해도 추석명절은 우리의 전통적인 축제일이다. 모든 날이 한가위 날만 같으라는 말이 있듯, 면면히 이어온 생래적 기쁨이 추석이면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다. 동산 위에 떠오른 한가윗날 보름달을 보면 우리는 만 가지 근심을 그 달 속으로 띄워보낸다. 조상이 살아온 이 터전에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것, 가족의 안락에서부터 국가의 안정까지, 한가위 보름달에 그 염원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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