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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의 추석(천자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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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의 추석(천자춘추)

입력
1996.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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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어느 땐고 팔월 대명일 추석이로구나. 다른 집에서는 떡을 헌다, 밥을 헌다, 자식들을 곱게곱게 입혀서 선산 성묘를 보내고 야단이 났는디, 흥보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자식들이 모다 졸라싸니까, 흥보마누라가 앉아 울음을 우는 게 가난타령이 되얏던가 보더라」박봉술명창의 박타는 대목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밤낮으로 벌었어도 온 가족이 가난을 면할 수 없으니 웬일이냐는 흥보 아내의 푸념과 한탄이다. 「경제위기」니, 「허울좋은 40대 명예퇴직」 운운하는 보도를 접하면서, 흥보 아내의 한탄과 우울이 바로 지금 내 이웃들이 겪고 있는 쓰디쓴 심정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망연자실할 수 만은 없는 일. 흥보 아내의 탄식에 장단을 맞추기보다는 「마누라가 이리 설리 울면 집안에 무슨 재수가 있겠냐」며, 거뜬거뜬 박 한 통을 따러 올라가는 흥보의 흔연스런 몸짓에 공감해 볼 일이다.

박타령은 흥보에게 닥친 어마어마한 횡재를 먼저 생각케 하는 소리로, 여러 판소리 레퍼토리 중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인기대목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으면서 흥보의 행운을 시기할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 이유가 단지 흥보가 선행을 베푼 이였기 때문일까.

흥보는 비록 가정을 풍족하게 이끌지는 못했지만, 소박한 꿈과 웃음을 잃지 않은 건전한 생활인이자, 가장이었다. 추석을 앞두고 궁기라도 면해 볼 요량으로 박을 타면서 「아무것도 나오지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라는 소원을 품었던 흥보. 그는 박 속에서 나온 이상한 궤짝이 혹 위험한 것은 아닌가 싶어 아내와 자식들을 사립문 밖에다 피신시킨채 혼자서 그 궤짝을 열어보는가 하면, 박 속에서 나온 옷감으로 멋을 낸 아내에게 「버들 속의 꾀꼬리」같다며 찬사를 보낼 줄 아는 여유를 지닌 이기도 했다. 흥보의 큰 횡재수는 이렇듯 어려움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흥보의 웃음과 여유의 대가가 아니었을까 싶다.<송혜진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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