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정치 경계찾기 문단 재편/조선공산당 따르는 「문학가동맹」 결성/우익단체론 「문필가협회」 조직/김동리 중심 「청년문학가협회」 분리/「한국문학가협회」로 단일화속 방대한 중간파 존재객: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문제란, 세계사 속의 냉전체제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 냉전체제가 허물어져 버린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뭔가 허망해 보이지 않습니까. 신탁통치안(1945.12)을 둘러싸고 우왕좌왕하던 모습, 반탁에서 하루 아침에 찬탁으로 돌변한 조선공산당의 정책 변화와 이에 따르는 문학가동맹측의 행동은 흡사 꼭두각시놀이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이런 생각은 결과에서 원인을 이끌어내는 헤겔주의적 역사관의 못된 버릇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따지고 보면 당대의 현실 속의 인간 그 누구도 한 치 앞도 못 보면서 사는데도 말입니다.
주:해방공간이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나듯, 문학과 정치의 경계선이 채 형성되지 않은 공간이었음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없을까. 해방공간에서 정부수립 그리고 6·25 직전까지의 5년간이란, 그러니까 정치와 문학의 경계선 찾기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순수와 비순수의 경계선 설정의 과정이랄까. 요컨대 문학사적 의미캐기랄까 뭔가 그런 것으로 이 시기를 정리하면 한층 생산적이 아니겠는가.
객:정치와 문학의 경계선 허물기 과정으로 본다면, 우선 정치의 영역부터 분명히 해 두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문학단체들의 성격파악이겠는데요.
주:맨 먼저 조직된 것이 문학건설본부(1945.8). 조공의 최용달(경성제대파)의 지도 밑에 있었으며 임 화가 그 중심인물. 한편 구카프의 조직인 프로예술연맹(1945.9)이 등장. 이 둘을 함께 묶고자 의견접근이 이루어져 문학동맹(1945.12)이 성립되고, 전조선문학자대회(1946.2.8∼9)에서 문학가동맹으로 확정. 한편 북쪽에선 독자적인 예술조직이 형성됨.
객:잠깐. 그렇다면 선생이 자주 말하는 평양중심주의란 당초부터 별개로 출발한 것입니까?
주: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이 북쪽에서 이루어진 것이 1946년 2월. 이기영의 작품 이름대로 「개벽」(1946)이 아닐 수 없지요. 사실상 분단은 이때 이루어졌던 것. 경제혁명 그것이 기본혁명이니까.
객:유상몰수 유상분배에 의한 남쪽의 토지개혁과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전제 아래 문학단체도 분석해 봐야 된다는 것이겠군요.
주:맨 먼저 조직된 우익단체는 김광섭, 이헌구 등 해외문학파 중심의 중앙문화협회(1945.9). 이를 확대 조직한 것이 문필가협회(1946.3). 이름 그대로 문필가의 모임이니까 김범보(김동리의 맏형)를 제1번으로 한 오종식, 이선근, 설의식, 정인보, 이관구, 박종화 등 언론인 중심의 단체.
객:좌익의 단체에 한 발씩 뒤져서 그에 대항하여 생겼음이 한눈에 드러나는군요. 그러나 석연치 않은 것은 문학가동맹이 순수 문인단체임에 비해 문필가협회 쪽은 언론인 중심이라, 불순하다 볼 수 있겠군요.
주:김동리 중심의 청년문학가협회(1946.4.4)가 문필가협회 쪽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이로써 문학가동맹과 청년문학가협회는, 단체로서는 적어도 각각 순수한 자리에 선 것입니다.
객:문학사적 고찰의 좌표가 비로소 설정되었다는 뜻이군요.
주:그렇기는 하나 꼭 한 가지 전제가 승인된 다음이지요.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논쟁이란 언론기관을 떠날 수 없다는 점이 그것. 문인도 언론기관 소속이었던 것입니다. 가령 임정계 「민국일보」에 이헌구, 오종식, 김광주, 조연현 등이 편집진용을 이루었고, 김광주는 임정의 선전부 소속이었고, 김동리는 「경향신문」, 「민국일보」, 「서울신문」에 관계했으며, 조연현은 대한노총의 선전부장이기도 했던 것(「조연현문학전집(1)」 참조).
객:말하자면 우익문인들도, 순수문인인 경우에도 신문기자로서 날카로운 민첩성과 활동성, 임기응변적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는 것, 그러기에 문학가동맹의 정치주의 문인들과 족히 맞설 수 있었다는 것. 선생이 말하는 문학사적 좌표가 이로써 성립되겠군요.
주:그렇소. 양쪽이 꼭 같이 정치단체의 언론기관 종사자의 처지에 있었다는 것, 진정한 맞수였다는 것, 그러기에 양자가 문학을 두고 논의하든 정치를 두고 논의하든 같은 좌표 위에서 가능했다는 것. 이 점을 간과하면 어떤 논의도 헛돌 수 밖에.
객:김동리의 저 유명한 논설 「제5호 성명의 내용과 선전」(「동아일보」, 1946.4.22∼23)도, 해방 후에 쓴 그의 첫 평론 「조선문학의 지표」(「청년신문」, 1946.4.2)도 같은 좌표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겠군요.
주: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스티코프 장군이 발표한 「제5호 성명」의 정확한 해석이, 모든 정객을 제치고 일개 청년문사에 의해 논파되었다 함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현단계의 혁정현실을 민족적 각도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주류적이자 정통적」이라 주장하는 김동리의 문학론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
객:그렇군요. 요컨대 임 화든 김동리든, 좌우간 순수문인들의 맞대결이라는 것, 그러니까 다음 단계는 작품으로 대결함이야말로 불을 보듯 훤한 노릇이겠는데요.
주:작가 김동리의 해방 후의 첫 작품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윤회설」(「서울신문」, 1946.6)이지요. 「두꺼비」(1939)의 속편. 두꺼비에 관한 설화가 우리 민속으로 널리 전해진다는 점에 착안한 작품이 「두꺼비」.
객:능구렁이에게 잡혀 먹힌 두꺼비는 마침내 능구렁이를 죽이고 그 능구렁이의 뼈마디마다 무수한 새끼가 생겨난다는 민간전설이겠군요. 가장 흉측하고 미련하게 생긴 두꺼비의 생리가 실상 가장 강력한 능구렁이를 끝내 이겨낸다는 것. 약자의 논리라고나 할까.
주:일제 말기, 민족주의자의 아들 종우가 사상운동으로 검거되었고 시국에 협조한 삼촌(보호자) 덕분에 풀려난다. 한편 동지들은 잠적하기도 하고, 배신자가 되기도 한다. 이 갈등 속에 놓인 종우의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인가. 카페에서 사귄 여인에 빠져 보지만 그녀 역시 그를 배신한다. 막다른 골목. 종우는 스스로 결핵에 걸려 각혈하는 길을 택한다. 두꺼비의 생리를 연상하면서 종우는 죽음을 바라본다. 일제라는 거대한 능구렁이에 맞서는 김동리식 방식이지요.
객:노신(루쉰)투의 정신적 승리법이겠군요. 해방이 된 마당에 그 두꺼비는 어떻게 되는가. 이번엔 일제 대신 거대한 붉은 수레바퀴와 두꺼비의 대결이겠군요. 맞습니까?
주:주인공 종우는 해방을 맞자 길을 잃습니다. 민족주의자집안의 아들이고 철학자인 그는, 더 이상 약혼자를 사랑할 수도 없는 상태. 한편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는 좌경. 약혼자도 점점 좌경해 가고 있지 않겠는가. 막다른 골목에서 그가 택한 길은 결혼. 어떤 사상보다 인간의 생물적인 조건이 앞선다는 신념의 획득에 이른다.
객:잠깐. 그렇다면 두꺼비설화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인간중심주의라고나 할까.
주:능구렁이의 뼈마디에 무수히 돋아난 두꺼비 새끼들의 해방 후의 상황. 그 새끼들이 이번엔 좌우익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지 않겠는가. 종우는 분명 우익 편에 섰고 결혼 직후 부부는 서울운동장 우익모임(독립쟁취 국민대회)에 참가했다는 것. 거기엔 좌익의 누이부부가 빠져 있었다는 것.
객:그러니까 영락없는 시국소설 또는 정치소설이겠군요. 작가의 시국에 대한 태도 표명이랄까. 장차 수많은 두꺼비 새끼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리라는 것까지 예견했다는 것.
주:이원조(문학가동맹 초대 서기장)가 이 작품을 「정치소설」이라 규정, 혹평한 바 있습니다. 정치적 현실조차 왜곡했다는 것(우익의 그 대회는 며칠 동안 선전한 뒤에 이루어졌다는데도 하루 아침에 모인 것처럼 한 점). 거기에서 「민족혼」을 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기껏해야 거짓 위에 세워지는 것이 민족혼이겠느냐.
객:짐작이 갑니다. 김동리의 답변이 「역마」(1948)라는 사실을. 시대성이랄까 정치성을 아득히 초월해 버리기. 이른바 「구경적 삶의 형식」에다 창작의 승부 걸기.
주:이 시기의 문학적 입지는 (A)김동리의 「역마」, (B)안회남의 「폭풍의 역사」(1948), (C)염상섭의 「이합」(1948)으로 정리됩니다. (A)가 운명타개의 문학이라면, (B)는 계급성에 입각한 민족·민중문학이고, (C)는 이른바 중간파의 문학.
객:대한민국 정식정부(김동리의 용어) 탄생(1948.8.15) 이후로 문단이 크게 재편성되었을 텐데요. 적어도 (B)문학가동맹이 극복대상이었을 터이니까. (B)란 결국 (C)중간파로 흡수되거나 월북하거나….
주:정부수립 이후 우익측이 주도가 되어 이루어진 문단 단일화의 결실이 이른바 한국문학가협회(1949.12.17)의 결성이지요.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가 중심이 되어, 문학가동맹측의 전향자를 전면 포섭하기 위한 조치였다고나 할까. 「자수 또는 전향자」를 당국에선 보도연맹에다 흡수한 것과는 별도였지요.
객: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이나 지난 시점 아닙니까. 그만큼 내부 정비의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주:청년문학가협회가 창간한 순문예지 「문예」(1948.8)의 창간이 썩 상징적이지요. 동시에 그들은 「서울신문」계(「신천지」 및 「주간서울」)를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내부 정비에 그만큼 시간이 걸렸던 것이니까.
객:드디어 해방 4년만에 김동리, 조연현등 청년문학가협회측, 곧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문협정통파」가 천하평정을 한 셈이군요.
주:글쎄요. 표면상 천하평정일지 모르나, 내면은 별로 그렇지 않지요. 방대한 중간파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그 대표자 백 철은 「신현실주의」라 하여 중간파의 문학적 입론을 세웠지요. 그는 또 이를 리얼리즘이라 불렀던 것. 「문학의 길」이 아니라 「소설의 길」(1950.2)이라 하여, 현실성(대중성, 시사성, 일상성)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장편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단편이라도 시적인 쪽이 아니라 현실고민을 다룬 것이어야 한다는 것. 김동리의 첫 장편 「해방」(「동아일보」, 1949∼50)이 실패한 이유까지 그 증거로 내세웠던 것. 이 중간파의 리얼리즘론은 훗날 참여문학(민중·민족)으로 이어지지요.<김윤식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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