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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느끼는 고독한 인간 실존/예술의 전당 사장 이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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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느끼는 고독한 인간 실존/예술의 전당 사장 이종덕

입력
1996.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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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 꿰뚫는 섬세한 통찰력 아직도 가슴떨림으로아침 저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대기의 서늘한 기운이 하루 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 달력을 쳐다보니 벌써 백로가 지나고 추분, 추석이 가깝다. 이제 곧 예술의전당을 감싸 안은 우면산의 여름내 푸르렀던 녹음도 붉게 물들고, 결국은 한 줌 낙엽이 되어 떨어지리라.

벌써 장년을 넘어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이맘 때쯤이면 연례행사 치르듯 알 수 없는 비감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비단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금씩은 우울해지고 감상에 젖게 되는 계절, 가을. 계절의 변화에 이렇듯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인간도 자연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낱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동물이구나」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파스칼이 말했듯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어디에서 처음 읽었는지는 하도 오래되어 기억에 없지만, 가을이 되면 파스칼의 경구와 함께 생각나는 시가 바로 신경림시인의 「갈대」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갈대와 신경림의 갈대는 다르다. 둘 다 인간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갈대의 비유를 통해서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큰 차이가 있다. 파스칼의 갈대는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육체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인데 비해, 신경림의 갈대는 개별자로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고독한 인간실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농무」의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나는 신경림시인을 「갈대」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만큼 이 시를 읽고 나서의 감동이 컸던 것이다. 그 감동은 지금도 나를 떨게 한다. 특히나 요즘같은 계절에는 더욱 그렇다. 달 밝은 가을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을 읽어내고, 어느 순간 그 갈대의 흔들림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 울음(본래적인 슬픔 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조건)에서 비롯됨을 꿰뚫어 본 시인의 통찰력은 지금 읽어봐도 놀라울 뿐이다.

가만히 소리내어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 자신이 달빛을 받으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된 것처럼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가슴 속에서 어떤 떨림같은 것이 형성된다. 그 떨림 속에 한참동안 자신을 맡겨두면, 떨림이 멈춘 후 전보다 훨씬 가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슬픔도 힘이 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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