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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결실(천자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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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결실(천자춘추)

입력
1996.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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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이 있는 곳엔 땀이 있다. 사실 그런 땀은 누구나 흘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흘리는 땀을 통해 분명한 존재이유를 확인할 터이다. 그런데 내게 그러한 땀이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페달을 밟을 때처럼 헛되고 힘들던 때가 있었다. 며칠 전 시내버스에서 내려 농로를 따라 들녘을 바라보며 걷던 중 나는 그 생각을 떠올렸다. 지난 6년간 모내기와 추수를 해온 들녘에서 흘린 땀을 말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 몸에서 나는 쉰 땀내를 맡았었다. 그러던 내가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놀란 것이 6년 전이다. 그건 마치 내 인생의 어느 부분인가 곪아터져 나는 냄새같기만 했다.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 몸에서 나는 냄새도 잊혀졌다. 아니, 사실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느낄 필요도 없었던 것일 게다. 그런데 어느덧 나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은 곪아터진 상처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건강한 땀내로 바뀌어 있었다. 냄새가 바뀌자 결실이 보였다. 먼지와 꺼럭으로 견디기 힘든 일거리로만 보이던 들녘의 낟알들이 황금빛 바삭거림으로 전해들기 시작했다.

『힘드시죠?』

『좀 쉬었다 할래?』

종일 들판을 오가며 콤바인에서 쏟아져 나오는 볏가마를 나르던 아버지와 내가 나누는 대화란 이런 정도다. 그러면 나는 당신 발치에서 멀어져 논두렁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는 게 고작이다. 6년 전에도 그랬고, 추수가 시작되면 아마 올해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두 마디 대화는 곪아터진 상처에서 나던 냄새가 건강한 땀의 냄새로 바뀐 것만큼이나 그 의미는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쉰 땀내만큼이나 잘 배어 있는 것이다. 담배까지 끊어버린 당신께서는 뒷짐을 진채 볏가마를 둘러본다. 그렇듯 서성이는 당신의 저 오랜 뒷짐과 땀내음을 나는 기억한다.<박경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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