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나 통신으로 날아오는 용건만 적힌 편지, 일을 부탁하는 청탁서…. 이런 것 말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속얘기를 담아 편지를 주고 받아본 지가 언제이던가 싶게 편지와는 멀어지고 말았지만,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가을바람처럼 서늘하게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이 즈음엔, 마음을 글로 적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인다.콧소리를 살짝 넣어 애조와 애교를 동시에 띤 목소리로 부르는 서도민요 「산염불」 사설 중에 「어젯밤에 꿈 좋더니 임에게서 편지왔네. 그 편지를 받아다가 가슴 위에다 얹었더니 인찰지 한 장이 무겁겠소마는 가슴 답답해 못살겠네」라는 사설도 어느 때보다 정감있게 와 닿는 걸 보니 가을 깊어짐을 더 느끼겠다.
「산염불」은 황해도의 대표적인 민요인데 제목에 「염불」이라는 말이 붙어 불교노래인 듯도 하지만, 후렴구를 제외하고는 노래풍이나 사설이 매우 서정적이다. 시조시를 길고 유창한 가락에 얹어 뽑아내는 이 노래는 수심이나 한스러움보다 인생을 바라보는 여유로움이 담겨 있으며, 노래 중간에 살짝 엿보이는 「가슴 답답함」은 오히려 삶을 경박하지 않게 이끌어주는 힘이 되어 주는 듯 해서 좋다.
「산염불」가락에 취해 「편지지 무게의 답답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즐기는 중에 인상깊었던 편지얘기가 생각난다. 중국 송대의 화가 곽휘원은 어느날 타지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썼는데, 부치고 나서 보니 글 대신 흰 종이를 봉투에 넣어 보냈더라고 한다. 그런데 실수를 어찌 수습할까 망연해 있던 그에게 도착한 아내의 편지에는 뜻밖에도 「벽사창에 기대어 어른의 글월을 받자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 뿐이오라/ 아마도 어른께서 이 몸을 그리워하심이/ 차라리 말 아니하려는 뜻을 전하고자 하심인 듯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남편의 실수를 사랑과 신뢰로 덮어준 그 뒷얘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일로 인해 화가는 귀엽고 재치있는 아내에게 더욱 더 큰 사랑을 품게 되었으리라.<송혜진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송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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