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사람들은 오누이처럼 손잡고 있는 해발 293m의 대모산과 306m의 구룡산을 사랑한다. 며칠전 오랜만에 대모산에 갔다가 아기자기한 구민행정의 표본 하나를 보고 지방자치제를 실감했다. 수서쪽 초입에서 경주 불국사와 이름이 같은 절로 향하는 800여m의 등산로 양편에 살아 있는 「식물도감」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강남구청이 2억원의 예산을 들여 5월부터 조성한 「대모산 등산로변 자연관찰로」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자생목과 야생화, 덩굴류가 멋진 「문패」를 달고 새집살림중이었다. 종합안내판을 보니 철쭉 등 관목류가 9종 3,600여 그루, 금빛줄사철 등 덩굴류가 12종 9,470본, 구절초 등 야생화가 42종 6만6,000여 포기나 됐다. 전설과 유래를 예쁜 글씨로 써놓은 450개의 표찰에 담긴 정성도 돋보였다. 얌체손에 도둑맞을 염려가 없느냐는 질문에 구청관계자는 『강남주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믿는다』고 했다. 그는 이곳이 성공하면 대모산에서 구룡산에 이르는 2.5㎞의 주등산로에도 자생목과 야생화길을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대모산의 새식구들과 통성명하면서 올라가는 발걸음이 그 어느때보다 의미 있고 산뜻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로 알려진 과꽃이 홀로 된 부인의 정절을 지켜 주었다는 유래도 그날 알았다. 특히 할미꽃 표찰을 보자 초등학생 때 병정놀이하던 부산 구덕산의 봄날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할미꽃! 얼마만에 불러보는 이름인가. 꽃은 지고 없었지만 이름표만 보아도 반가웠다.
언젠가 이청준씨의 동화책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의 표지에서 그 꽃을 보고 동심에 젖은 적이 있다. 내년 봄이면 불국사 가는 길에서 허리 굽은 할미꽃을 볼 수 있으려나. 해후가 쉽지만은 않을 성싶다.
약수뜨러 가는 자동차등산족이 늘어 먼지공해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구청은 모처럼 만든 「작품」이 전시행정으로 끝나 버리지 않도록 등산로입구에 쇠말뚝이라도 박아야 한다. 2억원이면 달동네 한두 곳의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알차게 쓸 수 있는 돈이다. 주민들도 물 몇통 위해 차등산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며 길섶의 「보석」을 보면서 어린 시절 뒷동산의 추억에 잠겨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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