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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제작자”“난방박사” 테크노 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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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제작자”“난방박사” 테크노 코리안

입력
1996.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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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보잉사 프로그램매니저 장인혁씨/차세대 항공기 등 「두뇌」 만들기 총지휘/끝없는 자기계발 차장된 후 MBA 마쳐장인혁씨(42)는 세계유수의 항공기 제작회사인 보잉사에서 기름때를 묻혀가며 승진을 거듭, 한인으로는 드물게 이사급 대우를 받고 있다. 보잉사의 프로그램매니저인 그는 엔지니어 300명 등 1,5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특히 항공기의 두뇌에 해당하는 블랙박스를 제작하는 항공전자시스템 부서를 담당, 보잉사 최고 경영층과 직결된 업무를 보고 있다. 차세대항공기인 보잉 777기와 650석 이상의 초대형기종인 747―600X, 420석인 500X기의 블랙박스 제작도 그가 맡고 있다.

흔히 항공기사고때 조종사와 관제탑의 교신추적장치 정도로만 알려진 블랙박스는 기능이 훨씬 다양한 컴퓨터 종합시스템이다. 블랙박스는 운항 기록과 조종, 연료등과 관련한 각종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항공기의 모든 기능을 조절하는 두뇌역할을 한다. 때문에 회사 수뇌부도 깊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최근에는 아시아나항공에 인도한 보잉 767―GMF 화물기에 「뉴카고 시스템」을 최초로 장착시키기도 했다. 이 시스템은 화물 팔레트를 리모트 컨트롤로 조종, 사람이 화물배치를 하던 방식에 비해 안전도가 뛰어나고 적재시간도 절약한다.

보잉 본사가 있는 워싱턴주 시애틀의 워싱턴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83년 보잉사에 입사, 비행테스트 부서에서 평범한 엔지니어로 출발했다. 그러나 성실성을 인정받아 입사 6년만인 89년 시니어 매니저(차장)로 승진했다. 또 90년 MIT에서 MBA(경영학석사)과정을 이수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 지난해 이사급인 프로그램매니저로 승진했다. 프로그램매니저가 되려면 통상 100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그는 『미국기업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다양한 전문인력을 요구하고 있으며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아시아시장 공략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실력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미국기업에서 성공하려면 꾸준히 자기연마를 하는 길 밖에 없다』며 『경영마인드를 갖지 않았다면 평범한 엔지니어로 남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신일고를 졸업한 뒤 75년 콜로라도주로 이민온 그는 83년 미국인 줄리씨와 결혼, 조셉(12)과 앤드류(10) 두 아들을 두고 있다.<시애틀지사=안용한 기자>

◎러 모스크바 난방책임자 알렉세이최/집단 에너지 공급체계 독보적 권위자/“91년 조국땅 처음 밟고 무한한 자부심”

「계절을 앞서가는 사람」 「모스크바의 난방박사」 「작은 거인 카레이츠(한인)」

이는 거대도시 모스크바의 각 지역에 에너지와 난방, 온수공급을 담당하는 러시아동포 알렉세이 최(66)를 일컫는 말이다. 자그마한 키에도 불구하고 옹골찬 최박사는 더운 여름에도 기나긴 겨울철 난방을 생각해야 하는 모스크바시 관료다.

그는 50년만에 최고더위를 기록한 지난 여름 내내 섭씨 영하 20도의 강추위속에서 열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신소재의 개발 등 효율적인 난방 및 온수 공급 시스템을 연구하며 보냈다.

또 모스크바 일원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온수관을 정비하고 교체하는 작업을 지원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모스크바는 집단 난방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어 그가 여름내 땀을 흘리지 않으면 시민들은 겨울을 나기가 힘들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의 사무실에는 난방공급 체계를 도식화한 도표들이 가득 걸려있다.

그는 평생을 구소련 특유의 집단 난방시스템을 개발하고 개선하는데 보냈다. 30년 연해주의 올린에서 태어나 오데사 기술종합대학에서 난방역학을 전공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옮겨와 시의 난방 및 온수 공급 체계 설계와 설비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57년 모스크바에 첫 발을 디딜때만 해도 주변에 친지가 아무도 없어 어렵게 생활했다. 작은 거인이라는 주변의 평가도 그같은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기술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노력을 높이 산 덕택이다.

『한국과 구소련의 수교로 60평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과학자 대표단의 일원으로 91년 난생 처음 한국땅을 밟았는데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조국의 모습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조국을 제대로 알게됨으로써 자신의 불우했던 젊은 시절을 보상받았다고 만족해했다.

남은 여생은 조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94년 독립국가연합(CIS)내 한인 과학·기술자협회 회장직을 맡아 양국간 과학·기술교류 진전을 위해 뛰고 있다.

한·러간 과학·기술분야 교류는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으나 뛰어다닌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93년부터 모스크바의 에너지 공급 기술개발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모스크바=이진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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