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혼 통곡인듯 세찬 빗속 반란 선원 인계/생존 이씨 부친 먼발치 아들 본후 정신잃어○…선상반란사건이 발생한 페스카마 15호를 일본에서 예인해온 부산 해경소속 구난함 3001함은 31일 상오 5시5분께 부산 영도구 조도앞 1㎞해상까지 접근, 페스카마호와 연결한 예인줄을 풀었다.
3001함은 세찬 비가 내리는 가운데 미리 대기하고 있던 3백톤급 경비정 300함과 연결, 해경 수사과 직원 12명이 3001함으로 건너가 중국인선원들을 호송, 3분만에 신속하게 인계절차를 종료했다.
○…해경부두에 도착한 중국인선원들은 해경수사과직원 2명씩에 의해 양팔을 끼이고 수갑과 포승줄에 묶인 채 초췌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해경부두에 하선했다. 이들은 생각보다 몸체가 왜소했으며 얼굴이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유일한 한국인 생존자 이인석씨(27)는 흰색셔츠에 회색바지를 입은 채 상기된 모습으로 하선했다.
○…일본해상보안청으로부터 페스카마호를 인계받아 처음으로 이 배에 승선했던 부산해경 3001구난함 소속 신규태 순경(41)은 『27일 하오 페스카마에 탔을 때 인도네시아선원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조타실에 웅크리고 있었고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비린내가 온통 배안에 진동했다』고 말했다.
신순경은 『20여일간을 표류한 뒤라 그런지 선원들은 모두 탈진상태였고 갑판엔 조선족 중국선원들이 도주용으로 만들었던 나무보트 2개가 있었고 갑판과 선실 등 선박 곳곳도 어수선한 상태였다』고 전했다. 중국 선원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구난함에 옮겨 태울 때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저항없이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고 신순경은 말했다.
○…페스카마호 선원가족 가운데 가장 먼저 부산해경에 도착한 생존선원 이씨의 아버지 이상호씨(69)등 가족들은 이씨와 말도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채 먼 발치에서 생존사실만 확인했다. 아버지 이씨는 아들을 본 직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원 212호에 승선했다가 맹장염이 악화, 귀국하기 위해 사고선박에 편승했다 산채로 바다에 던져진 실습기관사 최동호군(19)의 친모 박옥화씨(45)는 『사고가 발생한 8월2일 밤 집에 물이 차고 아들이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고 있는 꿈을 꿨다』며 『예감이 불길해 걱정했었는데 결국 이같은 변을 당했다』고 오열했다.<부산=목상균·한창만 기자>부산=목상균·한창만>
◎부산해경 서장 일문일답/“인니 선원 3명 최군 수장 가담 부인”
다음은 수사본부장인 사찬수 부산해양경찰서장과의 일문일답.
―중국인 선원들이 범행을 시인했는가.
『범행모의 단계에서부터 끝까지 대부분 시인했다. 그러나 일부 진술이 엇갈려 마무리 수사를 펴고있다』
―범행동기는.
『주범격인 전재천씨(38) 등 조선족 선원들이 하선후 스스로 부담해야할 경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강제하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확보된 물증은.
『탈출용 뗏목 2개가 배 안에서 발견됐고 쇠파이프와 도끼와 칼 등이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범행 가담여부는.
『중국인 선원들은 인도네시아 선원 3명이 최동호군(19)을 수장시키는데 가담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본인들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범행시간동안 생존선원들이 피해선원들의 비명소리는 듣지 못했나.
『망망대해인데다 엔진소리가 너무 커 듣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업중 한국인 선원들의 중국인 선원들에 대한 구타여부는.
『구타는 있었으나 심한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부산=한창만 기자>부산=한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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