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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비 분 시내트러(우리가 부른 팝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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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비 분 시내트러(우리가 부른 팝송:1)

입력
1996.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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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세대 달랜 달콤한 목소리/황폐해진 젊은 가슴에 낭만 선사/국내에 팝송 열풍 몰고온 주역들우리 대중음악은 1950년대 이후 미국 팝송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광복과 미군 주둔,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동안 우리 가요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팝음악의 큰 줄기가 흘러들어 다양하게 꽃피웠다. 팝음악은 한 때 젊은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면서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강한 전파력과 함께 새로운 감수성으로 다가와 가요계 풍토를 바꿔놓은 팝송과 가수, 그룹 등을 시리즈로 정리한다.<편집자 주>

『명동 시공관 건너편에 있던 음악다방 「은하수」가 인기였지요. 한마디로 미어 터졌어요. 2층은 다방이고 1층이 음악감상실이었는데, 지금 돈으로 2,000원쯤 내면 차 한잔 마시고 하루 종일 음악을 들을 수 있었죠』 「록의 대부」로 추앙받는 작곡가 신중현씨의 회고다.

『클래식과 팝음악을 소개했는데 아베크족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그곳을 자주 찾았습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 등이 당시의 DJ였어요. 그곳에 음반이 가장 많았고 기종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진공관식 앰프의 사운드가 기가 막혔습니다』

전후의 폐허 위에서 절망과 함께 그것을 넘어서려는 복구의 외침도 컸던 50년대.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팝음악은 당시에는 대중에게 익숙한 언어는 아니었다. 명동의 음악다방을 출입하거나 유성기를 갖고 있는 부유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었다. 국내 DJ 1호인 최동욱씨가 진행했던 KBS라디오 「금주의 핫 퍼레이드」(61년), 동아방송 「탑튠쇼」(63년)를 통해 대중에게 직접 들려지기까지 팝음악은 일부층에서만 향유됐다. 그러나 미국을 선망한 젊은이들에게 팝음악은 교양과목, 멋과 낭만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면서 팬들을 확보해 나갔다. 황폐해진 한국 젊은이의 마음을 다독여준 것은 솜사탕같은 목소리를 지닌 미국의 남성 가수들이었다. 빙 크로스비(1904∼1977년)와 패트 분(62), 프랭크 시내트러(81) 등.

「Misty」 「Autumn Leaves」 등 묵직하고도 감미로운 노래의 빙 크로스비는 그후 대표적 음반인 캐럴집 「White Christmas」(55년 발표)로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3억장 이상이 팔린 이 음반은 혼수로 전축을 마련한 신혼부부에게 인기높은 선물이었다.

「I’ll Be Home」 「Love Letters In The Sand」의 패트 분은 당시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팬과 인연을 많이 맺었다. 66년 첫 한국공연을 가졌던 그는 70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와 가족 화음을 들려주기도 했다. 80년대에는 그의 딸 데비 분의 「You Light Up My Life」도 한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프랭크 시내트러는 당시에 스탠더드(스윙) 재즈로 국내팬에게 알려졌다. 「Learnin` The Blues」 「The Tender Trap」 등이 단골 신청곡이었으며 69년 발표한 불멸의 히트곡 「My Way」로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한국에 보급된 이들의 노래는 달콤하고 낭만적이면서도 듣는 이를 들뜨게 하는 에너지에 충만해 있었다. 음악다방에서 발 박자를 맞추고 몸을 흔들던 젊은이들은 미8군 무대로 유랑악극단으로 다방의 DJ로 각각 팝음악을 전파해 나갔다.<권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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