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저녁, 마당에서는 한 낮 뙤약볕도 마다 하지 않는 콩중이들이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다. 하늘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 잠자리를 찾아들거나 서둘러 먹이사냥에 나선 새와 곤충들로 분주하다. 달구어진 대지를 식히는 바람이 지난다. 부지런한 거미들은 바로 이 때 새로운 거미줄을 치는데, 내 엄지손톱만한 왕거미 한 마리가 화단의 석류나무 가지와 추녀, 그리고 방아깨비들이 사는 마당 잔디밭을 세 축으로 그물을 치기 시작한다. 사십오 분 동안 반경 오 미터에 이르는, 실로 지난하고도 정교한 작업이다. 거미는 그물이 완성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소용돌이 모양의 중심에서 일을 마무리한 거미는 그물을 한 바퀴 둘러본다. 그물을 치는 도중 조그마한 날벌레들이 달라 붙어 두 군데가 모양이 헝클어졌지만 거미는 수선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확인까지 마친 거미는 그물 중앙에 위치해 꼼짝도 않고 먹이를 기다린다. 갓 뽑아낸 그물은 끈기면에서도 최상이고 곤충들의 이동 또한 활발한 시간대이고 보면 기다려 봄직도 하다. 분주한 움직임들 속에서 정지된 거미의 기다림은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나는 텃밭으로 향한다. 저녁식탁에 오를 풋고추 몇 개를 따기 위해서이다. 텃밭에는 가지와 이미 사그라진 오이를 비롯해 스무 포기 남짓한 고추도 있고, 열무와 넝쿨콩, 그리고 밭둑 둘레로는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지난해 고추는 너무 매워 먹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것은 약간의 매콤함이 있긴 하지만 껍질이 두텁고 씹으면 풋내 뒤끝에 들척지근하게 감겨드는 맛이 있다.
사방으로 어둠이 내리고, 식탁에 앉은 나는 잘 씻은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입 안에 넣고 고추와 고추장의 매운 맛을 떠올려본다. 하나는 발효된 매운 맛인데, 다른 하나는 바로 혀끝에 감지되는 살아 있는 매운 맛이다. 그 두 가지가 어울려 매운 맛이 중화된 듯한 맛깔스러움을 자아낸다. 나는 천천히 그 살을 씹으며 저녁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낮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만물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차지한 듯 한가롭고도 조용한 저녁이다.<박경철 소설가>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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