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해방공간의 문학/문인도 이상형 「나라만들기」 고민/남로당의 문학가동맹은 “인민연대”/북 조선 예술동맹은 “무산자 독재”/남의 청년문학가협회는 “민족주의”/국가모델 정해놓고 문학을 끼워맞추려는 모순과 극복객:8·15를 해방이라고도 하고 광복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사실상은 종전이었을 터인데.
주:빛의 회복이란 암흑을 전제로 한 것. 중국도 이런 시적 표현을 사용했지요. 우리의 림정 속엔 광복군이 창설되어 있지 않았던가. 한편 해방이라는 말은 어떠한가. 풀 해, 놓을 방, 곧 누군가에 의해 풀어 놓아졌다는 이른바 피동적 용법. 현실적인 용법이라고는 하나 뭔가 조금….
객:애국선열들의 목숨을 건 싸움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냉혹한 열강들의 힘의 논리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의 적시로군요.
주:그 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등실 춤을 추고 한강물 용솟음칠 것이라 시인(심훈)은 읊었지만, 정작 그 날이 왔을 땐 삼각산과 한강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
객:「해방은 한밤중 도적같이 온 것이다. 이것이 미신이라 하는 자는 이 땅에서 그림자도 없어져라」고 말한 사학자가 기억나는군요. 그는 또 이렇게 적기도 했지요. 「자기야말로 해방이 올 줄을 미리 안 것처럼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민중을 속여 인기를 얻고자 하는 더러운 야욕에서 나온 말」(함석헌)이라고.
주:「해방은 하늘에서 왔다」라는 명제, 이 종교적 표현은 시적 표현보다 그 울림이 크다고 하겠지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자리에서, 무지하고 못났기에 시키는대로 신사참배도 하고 징용도, 정신대도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민중이야말로 민족사의 주체가 아니었겠는가. 모리배 정치꾼들에 대한 모진 비판이 아니었겠는가.
객:그러나 현실정치란 시적인 것도 종교적인 것도 아닌 것. 어디까지나 현실의 기반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것은 산문적이고 방법론상 리얼리즘에 속하겠지요.
주:현실정치, 그러니까 현실이란 언제나 사회역사적인 것. 보편성과 특수성(불균등론)으로 설명되는 것. 한국근대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재점검하는 일이 일차적 과제일 수 밖에. 반제투쟁, 반봉건투쟁을 특수적인 것으로 껴안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근대사가 이 특수성을 보편성 속에 해소하는 장면에 이르렀다고 보겠지요.
객:보편성이란, 그러나 국민국가의 건설, 자본제 생산양식의 완성이라는 세계사적 방향성이겠는데요. 그 속에서 반제투쟁, 반봉건투쟁을 해소시킨다 함은?
주:통속적으로 말해, 「나라 찾기」에서 「나라 만들기」의 단계로 나아가기라 할까요. 개화기 「독립신문」(서재필)의 논조에 따른다면 근대국민국가의 형태는 입헌왕국의 국민국가였고, 3·1운동 직후에 성립된 임시정부는 헌법을 지닌 국민국가 형태였던 것. 만일 임시정부가 국가형태로 해방공간에서 수용되었다면, 일제강점기는 실상 9년(1910∼1919)밖에 안 되는 셈이지요.
객:김구 선생이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지 않았습니까. 임정을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국권상실기가 36년이었군요.
주:우리의 국권회복의 근거가 현실적으로는 카이로회담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것입니다.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것. 따지고 보면, 해방이 되었을 때 국권회복의 가능한 중심체로는 (1)임정계 (2)조선독립동맹 (3)김일성부대 (4)건국동맹(여운형)등 4개. (1)은 미군정에 의해, (2)는 소련군정에 의해 각각 무장해제당했고, (4)는 국내 체육조직이었을 뿐. 다만 (3)만이 총을 들고 있었던 것.
객:「적당한 시기」에 이들 네 가지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나라 만들기」의 판이 짜여질 수 있었기에 이 시기를 「해방공간」이라 부르는군요. 「역사적 시간」의 부재라는 뜻에서.
주:어떤 형태의 나라를 만들 것인가. 이 물음엔 모델의 설정이 불가피했을 터. 그 모델에 따라 한국사의 특수성이 해소될 것이겠고, 그럼으로써 바야흐로 보편성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터이지요. 세 가지 모델이 상정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 아닙니까.
객:북로당, 남로당, 한민당이 선택한 모델들 말입니까. 그래봐야 결국은 미소 양극체제의 산물 아닙니까.
주:(A)프롤레타리아독재의 국가형태 (B)연합독재(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지식인, 농민, 소자본가)의 국가형태 (C)시민독재형 국가형태가 그것. (A)북로당 (B)남로당 (C)한민당의 국가이념이 각각 이에 대응되지 않습니까.
객:선생께선 해방공간의 문학자의 설 자리를 문제삼고 있군요. 먼저 다음 사실을 따져놓을 필요가 없겠습니까. 문인으로서의 역사참여냐 한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참여냐 하는 점. 해방공간에서 실상 이 물음이 늘 헛돌고 있지 않습니까.
주: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가령 전쟁이 일어나 참전할 경우, 문인으로 참여하는가, 공동체의 한 인간으로 참여하는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지요. 아마 문인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는 없지 않을까. 본질적으로 문학이란 평화의 사업이니까. 해방공간에서는 어떠했던가. 「공간」이라는 점에 주목할 것입니다. 문인, 지식인, 인간의 구별이랄까 경계선이 사라진 특수공간 아닙니까. 「나라 만들기」의 과제이기에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이며 따라서 문인, 지식인, 인간의 경계선이 사라진 마당이지요. 이 대전제를 떠나면 문인들의 좌우익투쟁의 핵심을 파악하기 어렵겠지요.
객: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희유한 공간이기에 문인은 이미 문인일 수 없다? 문인이란 다만 지식인이었다?
주:해방이 되었을 때 맨 먼저 조직된 문인단체가 조선문학건설본부 아닙니까. 임화, 이원조, 이태준 등이 조직한 것이지요. 8월16일 새벽 임화의 방문을 받은 유진오는 금후 역사 전개단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임을 듣지요. 임화 뒤에는 경성제대 출신의 최용달이 서 있었다고 유진오는 훗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객: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은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다르지 않습니까? 전자가 사유재산 인정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후자는 사유재산 전면부정 아닙니까.
주: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인 박헌영의 이른바 8월테제는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노선의 천명이었던 것이지요. 무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지식인, 소자본가, 농민 등의 인민연대(연합독재)의 권력장악형 국가모델이 그 목표였던 것. 이른바 모택동(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1940)에 의거한 것. 훗날 이들이 남로당으로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이 국가모델을 지지하는 문인의 집결단체가 이른바 문학가동맹.
객: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란,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혁명에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 아닙니까. 요컨대 공산주의측의 일종의 전략 아닙니까?
주: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문학가동맹이 탄생한 것은 1945년 12월 무렵이었고 그 명칭이 확정된 것은 전조선문학자대회(1946.2)때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는 곡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객:「아서원 좌담회」와 「봉황각 좌담회」에서 논란이 된 것 말씀이로군요.
주:그렇소. 북한쪽에서 파견된 이기영, 한설야, 한재덕, 연안에서 귀국한 김사량등이 서울에 온 것이 1945년 11∼12월이었고, 이들과 임화, 이원조, 이태준, 김남천그룹이 중국집 아서원과 봉황각에서 두 차례 대토론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두 그룹의 날카로운 대립이 눈에 잡힐 듯이 드러나 있어 인상적이지요. 문인의 친일행위에 대한 이태준의 김사량공격, 임화의 자기반성론 등을 주목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 모임을 거쳐 마침내 구카프조직과 문학건설본부의 연합노선이 이루어집니다. 그 연장선상에 「전조선문학자대회」가 놓이는 것이고. 이로써 문학가동맹은 남로당의 외곽단체로 확정되지요.
객:그 문학자대회에 이기영, 한설야등은 참가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따로 북조선예술동맹(1946.10)을 만들지 않습니까. 문학가동맹이 인민연대의 국가모델을 선택한 것이라면 북조선예술동맹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국가형태를 선택한 것이겠지요.
주:잠깐 주목할 것은 이 사태의 내면에 「서울중심주의」와 「평양중심주의」의 지역대립도 짙게 깔려 있었다는 점. 평양 신영식당의 좌담회에서 이 점이 노골적으로 부각되고 있어 인상적입니다.
객:김동리로 대표되는 청년문학가협회는 어떻습니까. 민족주의노선의 국가형태, 곧 국민국가의 모델 선택, 다르게 말하면 부르주아독재 국가형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북로당과 정면으로 맞서는 국가이념이라 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맞서고자 한 대상은 문학가동맹측이 아니었던가요.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경우라 볼 수 없겠습니까.
주:이제 우리의 대화가 제일 핵심적인 데에 닿은 느낌입니다. 요약컨대, 첫째, 해방공간의 세 가지 문학단체가 각각 국가모델 선택에 엄밀히 대응된다는 것. 둘째, 이러한 이념성에 상응하는 문학이념이 한결같이 「민족문학」이라는 점. 어째서 「민족문학」이어야 했던가. 해방공간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아포리아(난제)였지요. 국가모델의 이상형 선택이 무엇보다 먼저 주어져 있지 않았던가. 문학은 그러니까 이 선택 다음에 왔던 것이지요.
객:이상형 국가 선택부터 떡 해놓고 나서 돌아보니 자기는 문학자가 아니겠는가. 비로소 문학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문학을 그 국가모델에다 끼워맞추기 행위가 벌어졌다. 그런 끼워맞추기를 해 보니 잘 되지 않고 억지스런 상태, 말을 바꾸면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맞습니다. 해방공간의 문학상의 위대성이 있다면 이 모순에 대한 자각과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문학논리의 탐구이지요. 그 위대성의 명칭이 「민족문학」입니다. 많은 곡절을 겪어 북조선이 「계급성과 민족성」의 모순극복에 이른 것은 안함광의 「민족문학재론」(1947)에서였으며, 남로당의 경우는 「계급해방 없이 민족해방 없다」는 논리 위에 구축된 임화(1947)의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으로 겨우 극복되며, 민족주의진영에서는 김동리의 제3 휴머니즘에 의해 겨우 극복되었던 것입니다.
객:과연 그 극복이 진정한 극복이었을까. 일시적 자기합리화랄까 끼워맞추기 수준에 머문 것이라 할 수는 없겠는가.
주:우리가 역사 밖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합니다. 다만 저는 이들 민족문학론자들의 고민의 밀도에 관심이 있습니다. 해방공간의 위대성이랄까 가능성도 이 고민의 밀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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