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성장 환상 이젠 벗어나야”/정부·기업·가계 다시 허리띠 졸라맬때/금리·지준률 인하 물가 고려 점진 추진/중앙은 본연 기능 확립 최선… 고액권 지폐는 검토 안해□대담=방민준 경제부장
돈은 경제의 혈액으로 비유된다. 돈이 너무 많이 풀려있으면 그 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오르고 너무 적게 풀리면 생산자금이 부족해 경제가 위축된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돈의 양을 조절·공급하는 기관인 중앙은행(한국은행)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우리 경제가 본격 하강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 게다가 내부적으로는 폐지폐 유출사건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한은의 사령탑에 올랐던 이경식 총재가 24일로 취임 1년을 맞는다. 이총재는 우리 경제의 당면과제는 9%대 고도성장의 환상을 하루속히 벗어버리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총재는 정부와 기업 가계가 모두 성장률 7%대 마인드로 재무장, 조금 더 일하고 덜 쓰는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이총재는 또 재임기간에 한은이 중앙은행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터전을 꾸준히 닦아놓겠다고 밝혔다.
―우리 경제가 위기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총재께서는 현재 우리 경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또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며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우리 경제가 지난해말부터 하강국면을 걷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장률(7%)을 보면 그렇게 나쁘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경상수지 적자가 예상보다 확대되고 물가도 높은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긴 하지만 비관적인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9%대의 고도성장에서 올해 7%대 성장으로 경제를 연착륙시켜 안정성장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업하는 사람이나 가계가 모두 9%대 마인드에서 7%대 마인드로 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행수지가 나쁘다는데 공항에 가면 해외여행객들로 붐비고 기업들은 재고가 쌓이는데도 선뜻 감량경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실효를 거두기 힘듭니다. 정부건 기업이건 가계이건 경제의 체질개선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비용·저효율」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최근 우리 경제의 「고비용―저효율」문제가 경제의 최대 과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금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무척 높습니다. 금리를 낮출 수 있는 방안은 없습니까.
○한꺼번에 낮추면 부작용
『다들 우리나라 금리가 굉장히 높다고 합니다. 사실 선진국에 비해 2∼3배 높은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제성장률(명목GDP성장률)이 선진국에 비해 2∼3배 높다는 말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한창 성장할 때는 그만큼 자금수요도 많고 자금의 기회비용도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과거 30년동안 금리를 낮추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낮추지 못한 것도 그만큼 우리 경제가 높은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돈 빌려쓰는 사람은 금리가 높다고 불평하면서 예금할 때는 예금금리가 낮다고 불평합니다.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등 대외개방을 앞두고 우리 경제의 고비용구조 해소가 무엇보다 긴요한 과제라는데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금리를 낮추려면 부작용만 생깁니다. 1년에 1%포인트씩 차근차근 내려가면 선진국수준이 될 것입니다. 그게 저의 지론입니다』
―시중은행들은 예금받은 돈의 일부를 중앙은행 창고에 이자없이 쌓아둬야 하는 예금지급준비금 부담을 줄여줘야 시중금리가 낮아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지난 4월 지준율을 낮추긴 했지만 추가로 낮출 계획은 없습니까.
『비단 금리를 낮추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은행의 경쟁력을 높이고 은행이 다른 금융기관과 공정한 입장에서 경쟁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지준율은 인하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준율을 너무 한꺼번에 인하하면 통화량이 급격히 늘어 통화관리가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혈압이 높다고 갑자기 낮추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점차 지준율을 낮추자는 것도 이같은 원리에 따르자는 것입니다. 금리를 낮추기 위해 통화를 방만하게 풀면 경제가 지탱될 수 없습니다. 어느 한쪽만 좋게하고 나머지는 희생하는 경제정책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은 우리 금융산업의 경쟁력이 평가대상 46개국 가운데 40번째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왕도는 없습니다. 규제를 풀어 경쟁시키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금융기관들은 가이드라인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규제안에 안주해서는 경쟁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은은 보험과 증권업의 영역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은행업무를 최대한 넓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지금도 금융권의 벽은 무너져가고 있지만 앞으로 더 무너뜨려야 경쟁력이 생깁니다. 누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잘못 경영하는 금융기관은 망하기도 하는 풍토에서 경쟁력이 배양된다고 생각합니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발행·관리비용이 많이 들고 사용하는데도 불편한데 10만원권이나 5만원권 지폐의 발행을 검토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마음속에 돈가치 떨어져
『고액권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여러모로 검토해 결정할 문제입니다. 관리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액권 지폐발행은 자칫 물가를 자극할 우려가 있습니다. 5만원 10만원짜리가 도입되면 기존 1천원이나 1만원권 지폐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가령 1만원짜리 10장을 내고 1천원의 거스름돈을 받을 때와 10만원짜리 지폐 1장을 내고 1천원의 거스름돈을 받을 때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작은 차이라 치부해버릴 수 있지만 화폐사용자들의 마음속에서 돈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물가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물가가 오르기 쉽다고 생각하는 인플레심리가 팽배해있어 고액권 화폐를 발행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총재께서는 1년전 한국은행이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에 취임, 중앙은행 개혁을 위해 노력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6년만에 금융통화운영위원회 회의록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앞으로 한은 개혁을 위한 새로운 계획이 있습니까.
○우수인력 유인 방안 강구
『꾸준하게 해나가야죠. 내부조직을 합리화하고 정책부서도 분발해야 합니다. 우수한 사람이 승진하도록 인사제도도 개선해나갈 계획입니다. 금통위도 명실공히 최고정책기관이 될 때까지 꾸준하게 노력해나가야죠. 무엇보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지금은 중앙은행의 고유기능인 지급준비율정책 재할인정책 공개시장조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려고 방향을 설정해놓고 있습니다. 물론 개혁은 요란하게 하면 끝이 좋지않습니다. 지나고나면 개혁의 성과를 실감할 수 있도록 해야 부작용이 없습니다. 최근들어 우수한 인력의 한은 입행이 줄고 있어 한은에 아주 우수한 인력이 들어오도록 하는 방안도 강구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기업과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덜 써야 합니다. 1만달러시대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일을 줄이고 많이 쓸 때가 아닙니다. 일본인들은 「서양을 따라가자 따라잡자 넘어서자」는 모토로 전후부터 80년대까지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잘 살게된 후 해이해져 최근 어려움을 겪었다가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습니다. 정부는 물론 기업 개인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정리=유승호 기자>정리=유승호>
□약력
▲1933년 경북 의성 출생
▲고려대 상학과졸
▲1974년 대통령 경제 제1수석비서관
▲1976년 체신부 차관
▲1979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1980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
▲1988년 대우자동차 사장
▲1989년 금융통화운영위원
▲1993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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