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들에게 8월하면 바다보다 더 그리운 것이 있었다.바로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이다.
불볕 더위를 녹이는 함성, 밤하늘을 가르는 백구, 학생선수 특유의 파이팅과 역전, 설익은 기량으로 인해 속출하는 에러등은 봉황대기에서 맛볼 수 있는 묘미였다. 더구나 예선전 없이 전국의 고교팀이 총 출전하는 봉황대기는 모든 야구선수들에게 야구의 메카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을 밟는 영광을 제공하는 설렘의 무대였다.
이 대회는 지방의 무명선수들에게도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었고 야구의 지역 평준화, 특히 호남야구의 중흥을 이루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 오늘날 한국야구가 일본과도 대등하게 맞설 정도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6년째를 맞은 올 봉황대기가 15일간 성동원두를 뜨겁게 달구고 20일 막을 내렸다. 이날의 결승전은 잠시 팬들을 70년대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군산상고와 인천고의 재학생과 동문을 포함해 2만여명이 몰려 열광하는 장면은 82년 프로야구 출범후 영영 내리막길을 걸을 것 같았던 고교야구가 회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기레이스의 지루한 프로야구와 달리 매 경기를 결승전으로 여기고 혼신의 힘을 쏟는 고교야구의 신선함은 팬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저력이 있었다.
대부분의 야구팬들은 아직도 고교야구에 향수를 갖고 있다. 1회 대회의 남우식(경북고)부터 장효조(대구상) 유중일(경북고) 박노준(선린상) 선동렬 (광주일고) 조계현(군산상) 박동희(부산고)등 봉황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들을 떠올리면 절로 가슴이 뛰게 된다.
고교야구의 황금기때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선수들은 30세가 넘어서도 프로의 간판으로 맹활약 하고 있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고서는 프로야구도 건실할 수가 없다.
프로야구 팀의 증가, 프로야구 수준 향상을 논하기 전에 고교야구의 회생에 눈을 돌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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