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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농성 여대생의 「투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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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농성 여대생의 「투쟁일기」

입력
1996.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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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우리가 기어나오기를 기다린다”/시위는 「싸움」 경찰 「적」 표현/충청총련 소속… 부산·대구 거쳐 연대 사전진입/“전경에 맞다니… 으 수치 그러나 영광의 상처/밥 못먹어 괴롭다 단수까지 됐다 빌어먹을…”20일 농성학생들이 모두 연행된 연세대 종합관 4층에는 신발 옷가지 집기들이 폐허처럼 널려 있었다. 이 아수라장 한쪽 구석에 충청총련 통일 문선대 소속 여대생의 「투쟁일기」가 발견됐다. 손바닥 크기의 수첩에는 7일 범민족대회 선전활동을 위해 부산에 집결할 때부터 검거직전인 19일까지의 행적과 농성에 참가해서 느낀 감상등이 깨알같은 볼펜 글씨로 적혀있었다. 투쟁기록이었다. 이 여대생은 수첩에서 경찰과의 대치나 시위를 「싸움」으로, 경찰을 「적」으로 표현했다. 이 13일간의 「투쟁기록」은 이 수첩의 주인공이 발랄한 여대생이라기보다 의식화한 투사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7일◁

하오부터 부산시내로 선전전을 나갔다. 별로 힘은 들지 않았다. 7일 부산에 도착, 통일선봉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큰사건이 일어났다. 머리를 맞고 뚝! 세상이 아찔했다. 병원을 갔었는데 별 이상은 없단다. 아직도 머리가 흔들린다. 어지러워. 밤 12시쯤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해서 지금 숙소앞에서 총화(토론)하고 있다. 경북대에서 미제 축출 미군 사유지, 주둔비 등을 주제로 총화를 했다.

▷8일◁

대구 경북대다. 다른 대원들은 대구교도소 항의방문가고 우리 문선대는 교내에서 창작을 하고있다. 어제의 충격때문에 정신을 못차리겠다. 계속 졸았다. 하오 5시부터 대구 동성로로 선전전을 나갔다. 7시쯤 마쳤는데 기독교 신자들 때문에 재미있었다. 하하. 후에 미 문화원 진격투쟁에 돌입. 처음으로 칙칙이(최루가스)를 맞았다. 9시쯤 경북대에서 집회 마치고 대전역에 도착했다. 드디어 대전이다.

▷9일◁

8일 대전 한남대에 와서 새벽부터 환영마당. 충련의장님이 마련한 술자리. 우리들의 옷을 가져다 주고 먹을거 주고 좋았다. 하오 4시30분쯤 대전역에서 집회를 가졌다. 다음날 청주나 수원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범민족대회 개최장소인 연세대를 경찰이 원천봉쇄할 것에 대비, 통일선봉대가 미리 교내로 진입해 대회장을 사수하라』는 지도부 지시에 따라 곧바로 상경, 연세대로 갔다. 4인1조가 되어 검문을 무사통과해 연대 진입에 성공. 후후 재미 있었다.

▷10일◁

아침겸 점심을 11시에 먹고 4시까지 쉬면서 창작을 했다. 3시쯤 전경들 학교앞에 출현. 비상! 우루루 나갔더니 벌써 끝이네∼. 저녁에 평·협팀과 품평회 준비하는데 다시 모여 전체 결의대회. 학교가 침탈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수대를 결성. 죽음을 결사하고 연세대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밤새 학교를 지킴. 밤새 지켰으나 전경이 오지않음. 힘내자 투쟁.

▷11일◁

저녁에 다시 학교 침탈이 예상되어 사수대를 결성한 후에 길가에서 밤을 새면서 연세대를 지킴.

▷12일◁

아침밥을 먹다 전경들과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솔직히 자신감이 없었다. 조금은 겁이났다. 최루탄도 싫고. 드디어 싸움이 벌어졌다. 전경이 던진 돌에 맞았다. 순간 찔끔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9바늘 꿰맸다. 으! 수치∼ 영광의 상처∼. 여전히 밤에는 연세대를 지키러 길바닥으로 나와야 했다. 범민족 개막식을 저녁에 했다.

▷13일◁

범민족대회가 시작이다. 우리가 그렇게 지키고자 사수하고자 했던 범대회가 오늘부터 시작이다. 오늘 오기로 했던 충청·남총련이 오지 못한다. 더러운 새끼들! 뭐가 그렇게 두려운거야! 조금 쉬다가 쳐들어오면 싸우고, 싸우다가 쉬고 그랬던 것같다. 덕분에 개막제가 열린 밤 몰려오는 잠을 어쩔 수가 없었다. 개막제를 위해 7일부터 그렇게 싸웠는데 정작 개막제 때 졸다니 부끄럽다.

▷14일◁

행사가 끝나고 아침에 조금자고 일어났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날짜 개념이 없고 시간대도 맞지 않는다. 하오에 비가 엄청나게 왔다. 상처는 모자로 가려서 어느정도 괜찮았다. 기분은 좋았다.옷도 없어서 갈아입지 못했다. 몇명의 지원을 받아서 판문점까지 가서 북에서 내려올 2백명의 학우와 우리측 대표를 맞으러 갔었다. 30명 정도 사복을 갈아입고 버스를 타고 갔었다. 하지만 평양으로 되돌아 가는 바람에 다시 무사 귀환했다. 나도 가고 싶었지만 가면 잡힐 위험이 많아 가지 못했다.(난 홀몸이 아니잖아…?)

▷15일◁

지금 생각하기가 너무 힘들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지만 머리가 띵하다. 다음에 써야겠다.

▷16일◁

새벽잠을 설쳤다. 엄청 추웠다. 가장 추운 밤이었다. 오늘은 집에 가겠지 하는 희망으로 얼굴은 밝았다. 또 개구리(동료의 별명인듯)가 희망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 밖에는 원천봉쇄 상태지만. 우리는 집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남총련 사수대가 북쪽문을 뚫으면 어렵지 않게 집에 갈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쪽에 백골단이 있어서 뚫리지 않았다. 우리는 종합관과 이과대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이동하면서 J 등 친구를 만났다. 인사도 못했지만 안쓰러우면서도 자랑스러웠다. 힘들어 하면서도….남자 친구 K와 D를 만났다. 모자를 쓰고 손수건을 두르고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는 K가 믿음이 가면서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9일 대전에서 봤을때는 살이 조금 찐것 같더니. 쇠파이프로 무장을 해도 여전히 D는 귀엽고 동글동글 한것 같다. 앳돼 보였다.

▷18일◁

종합관을 지키며 돌 옮기고 바리케이트 쌓고 쉬는데 적들이 침탈해서 싸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황을 잘 모르니 답답했다.

종합관에 고립됐다. 적들이 우리를 이대로 가두고 탈진시켜 우리 발로 기어나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넘어갈 조직이 아니다. 상부에서는 적들과 무사귀가 치료비배상 연대보상문제를 가지고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단전 단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어려운 상황일수록 우리사랑 한총련을 믿고 옆의 동지를 믿는다면 결국 우리가 이길 수 있으리라. 통일 문선대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중략>

저녁에 연세대 사수대가 앞 건물의 식당을 털어서 우리가 먹을 식량이 생겼다. 한 일주일 정도는 먹을수 있다 한다.(건물안에는 약 2천명이 있음) 쌀과 반찬 등을 나르는데 엄청났다. 식당을 거덜낸 것 같았다. 불쌍한 연대! 학교가 완전 박살나는구나. 이 새끼들! 빨리 집에 보내줘∼.

▷19일◁

또 하루가 갔다. 언제까지 우리가 싸워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 때문에 우리가 싸워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전경들도 이렇게 고생을 시키다니. TV와 신문을 보니 기가 막혔다. 북한의 지시를 받았느니 쇠파이트 특공대 등등. 신문이 뭐 지네들 소설 쓰라고 있는줄 아나보지! ×××들

밤 12시. 새 모이만큼 밥을 먹고 몸을 뉘었다. 앉아 있기도 힘들지만 누워있기는 더 힘들다. 운동이 부족한것 같다. 단수까지 됐다. 빌어먹을…. 본대는 밥을 안먹고 사탕과 과자만 먹는단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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